미국 건국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이다. 이는 인류 최초의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말들 중에서 “공통의 합의에 의해 정의된 법이 절대 개인에 의해서 짓밟혀서는 안 된다”라는 말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큰 교훈을 준다.
우리나라도 공화제를 채택하는 공화국으로서 건국 대통령이 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하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잘못된 인식과 나쁜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미 그는 유일 후보로 최소 득표수를 너끈히 넘긴 당선자였다.
지면상 긴 얘기는 힘들지만 이승만기념관에 남겨진 글을 인용으로 대신한다.
“나쁜 이미지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게 현실이다. 그런 대중적이고 속화된 인식이라는 게 어디까지가 맞는 얘기이고, 어디서부터 과장된 것일까를 점검해야 한다.”
1898년 4월 9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이 창간한 날이다.
이 신문을 창간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바로 이승만이다.
그가 신문을 창간한 것은 무지한 국민을 하루빨리 계몽해서 ‘똑똑한 국민’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봉출판사 박기봉 대표가 간행한 <우남 이승만 論說文集(논설문집) 1, 2, 3> 시리즈를 ‘더프리덤타임지’ 창간에 맞춰 연재하려고 한다.
「우남 이승만 論說文集(논설문집)>」 은 총 3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수록된 논설은 서재필이 조직한 학생청년회 ‘협성회’ 토론회를 이끈 이승만이 ‘협성회보’ 제작 편집을 맡았던 신문에서 수록한 것과 23세의 이승만이 ‘매일신문’을 창간 후 수록한 것 그리고 한성 감옥 복역 중(1899년~1904년)에 비밀리 집필하여 감옥 밖으로 보내 제국신문에 게재했던 수백 편의 논설 중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더프리덤타임지’는 비봉출판사에서 출간한 <우남 이승만 論說文集(논설문집) 1, 2, 3>에 수록된 논설 중에서 먼저 제1권 협성회회보(1898.1.~1898.3.), 매일신문(1898.4.~1898.7.), 제국신문(1898.7.~1904.3.), 태평양잡지(1913.11.~1930.11.), 태평양주보(1931.7~1941.5) 중에서 오늘의 날짜에 맞춰 그 날에 쓰여진 내용을 전재(全載)한다.
<덧붙이기>
지난해 12월29일 우남 이승만 論說文集(논설문집) 제1권 제119호로 제1권에 수록된 제국신문을 전재(全載)했다.
이어 2023년 1월1일부터 3월19일까지 협성회회보 논설을 전재(全載)했다.
지난 4월9일 부터는 매일신문을 전제(全載)한다.
광무 2년(1898년) 5월27일 매일신문에 실린 논설.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슬프도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형이여.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고. 근일에 당장 당하고 앉은 사정을 보아도 절통(切痛)한 일이 많은지라. 첫째, 우리 대황제 폐하께옵서 백성을 튼튼히 믿을실 수가 없으시어 이전 궁궐을 떠나서 외관(外官)을 따라 대궐을 지으시고, 외국 친구를 의지하여 계신 중이라. 자식들이 부모를 능히 섬기지 못하여 부모가 이웃 사람에게 의지하신 모양이니, 이는 곧 신하와 백성의 면하지 못할 죄책이오.
정부 관인(官人)으로 말할지라도, 아무쪼록 내 나라를 도와 일하려는 충심이 없음은 아니나, 외국 친구가 청구하는 것을 능히 항거하기 어려워 이따금 혹 시행하여 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니, 그네들을 대하여 흔히 시비도 하며 탓을 삼아 그러하되, 실상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관인되신 분들도 참 난처한 처지에 있는지라, 설사 외국 사람이 경계 없이 내 나라 것을 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경계 없는 말인 줄 모르는 것은 아니어서 그러하되, 성의(聖意)를 평안하시도록 하자 한즉, 어찌 외국 친구의 청하는 것을 막아 안으로 흔단이 생기게 하리오.
또한 그 관인이 나라를 위하여 외국인을 반대하다가 설사 시비하는 지경을 당하면 그 백성이 말 한 마디 아니하니, 무엇을 믿고 직분을 굳세게 지켜 가리오, 만일 외국 사람이 내 나라 관인을 대하여 경계 없는 일을 행하든지, 무리한 말을 하거든, 그 백성이 일심으로 들고 일어나 시비할 것 같으면 외국에서 감히 어느 섬을 빌리라거나 혹 어느 땅을 팔라고 관인들을 괴로이 조르지도 못하려니와, 아무리 조르더라도 감히 허락할 생각을 못할 터이니, 이도 그 백성이 나라 일을 남의 일보듯 하고 있어서 관인이 외국과 경계를 말할 힘이 없이 됨이니, 역시 백성의 책망이오.
또한 근일에만 보아도 외국의 무도한 백성들이 각처에서 대한 인민을 살해하였다는 소문이 사면에 들리되, 외국인은 그 대신 한 번이라도 벌을 주었다든지 배상 한 푼 받았다는 말 들어보지 못하였고, 대한 신민은 외국인을 대하여 말만 좀 실수하여도 명예 손해금을 얼마씩 문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중벌을 당하고야 마니, 이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은 성명이 매인 데가 없어 만 번 죽어도 호소할 곳이 없는 인생들이 되었으니, 백성이 제 나라를 보호하기는 고사하고 목숨을 보존치 못하는지라.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이 어찌 통곡할 일이 아니리오.
백성들은 의례히 그 관인을 칭원(秤寃)할 것으로 여기니, 이도 또한 어리석은 백성이라. 만일 내 나라 동포가 외국인에게 무단히 피살되었다는 소문을 듣거든, 각기 남이 당한 일로 알지 말고, 일심으로 일어나서 기어이 설치(雪恥)하고야 말려고 할 것 같으면, 그때는 관인된 이들이 외국인을 대하여 경계를 들어 말할 힘도 생기려니와, 외국 백성이 다시는 그런 버릇을 못할 터이거늘, 사람마다 그렇지 아니하여, 내 동리 사람이 당장 곤경을 당하여도 나서서 도와줄 생각은 없고 다만 내가 당한 일이 아니라고 심상히 보는 까닭에, 나중에 내가 그 지경을 당하는 날에는 나를 또한 보아줄 사람이 없어, 필경은 몇 천 명 몇 만 명을 한꺼번에 죽여도 나서서 말 한 마디 하여 줄 사람이 없이 되었으니, 이것도 또한 백성의 탓이라. 이것을 가지고 누구를 책망하여 칭원하리오.
만일 오래 이 지경을 면하지 못할 줄 알 것 같으면, 미리 자처하여 이런 일을 결단코 보지 말아야 도리어 나을지라. 이것을 면할 도리는 또한 어렵지 아니하니, 우리 신문 보시는 동포들은 이 말을 분히 여기거든 오늘 듣는 말을 뼈에 새겨 두고 잊지 말아, 사사은원(私事恩怨0을 다 내어 버리고, 여간 시비곡직(是非曲直)으로 정의를 손상치 말며, 정부와 백성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한에 관계되는 일은 일심으로 도와 서로 보호하며, 서로 역성하여, 죽기까지라도 단정코 함께 하려고 작정 할 것 같으면, 첫째 우리 목숨을 보호할 힘이 생길 것이오, 둘째, 나라 독립을 만년 무강케 만들기 어렵지 않을 터이라.
광무 2년(1898년) 5월27일 매일신문에 실린 잡보보.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잡보>
○ 인천, 안산, 부평, 양천, 시흥 등지에 불한당이 매우 심하여 떼를 지어 각 동리 부자에게 다니며 백주에 완완히 쌀과 전재(錢財)를 달라 하는데, 그 말대로 시행하면 가져갈 뿐이오, 아니 주려 하면 칼로 치고 불을 놓으며 부녀를 겁박한다 하니, 참으로 듣기에 대단히 송구한 일이더라.
○ 회장 리승만 씨가 매일신문 사장과 기재원을 겸임하기로 작정이 되다.
(매일신문 다음 호는 5월28일)
<편집자 주>
대통령(President)이라는 용어는 회의를 ‘주재한다(preside)’라는 말에서 왔다.
미국 사람들은 왕을 싫어했으므로 왕에게 사용하던 극존칭 대신 미스터(Mr.)를 대통령직 앞에 붙이는 관행을 만들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대통령이라는 칭호에는 왕으로부터의 독립,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정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근대민주주의 사상이 녹아 있다. King에서 President로의 대전환이다.
1904년 29세의 이승만은 고종 퇴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한성 감옥에 갇혀 있던 와중에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풍전등화’ 와도 같은 조선인들의 각성과 계몽을 위해서 쓴 책이다.
어느 언론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지금도 뇌리에 남는다.
“내가 29살이었을 때 이승만같이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쓰지도 못했겠지만, 만약 내가 29살 때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읽었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당시 시대상에서 통상과 외교를 이야기했던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본지가 수록한 논설로 재해석하고 제대로 인식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특히,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1896년 4월 7일 창간해서 오늘날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기념하고 있는데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듯이 서재필은 미국인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최초로 일간 신문인 <매일신문>을 1898년 4월 9일 창간을 했다.
이에 ‘신문의 날’을 4월 7일이 아닌 4월 9일로 바꾸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한편, 본지(本紙)에 전재하는 <우남 이승만 論說文集(논설문집)>은 비봉출판사 박기봉 대표에게 수락을 받았다.
(사진=더프리덤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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