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백신 접종.
지난 2021년 3월2일 오전 서울시 양천구 신목행복자리 어르신 요양센터에서 양천보건소 의료진이 관계자에게 코로나19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백신을 맞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도, 코로나에 걸려 효과 없음을 몸소 겪었어도, 부작용으로 죽도록 고생했어도 또다시 4차, 5차 접종까지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왜 백신을 맞느냐고 물어보면 남들이 다 맞으니까, 나라에서 맞으라고 하니까 맞는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해외에 나가기 위해,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으려고, 갓 태어난 손주를 안아보려면 자식들 원대로 접종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맞는다고 한다.
백신 접종이 취업의 기준, 해외여행의 요건, 심지어 손주를 안아볼 자격이 되는 기막힌 세상이 되었다. 신체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주권의식, 백신을 맞지 않아도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의식, 대한민국이 자유민주국가라는 정체성, 외국 백신 제조사로 수조 원의 세금이 유출된다는 경제 관념, 항생제 남용이 내성균을 초래하는 것처럼 백신 남용이 RNA 바이러스의 변이를 일으킨다는 의학 상식은 조금도 없다.
그렇게 백신을 맞는 사람 중에는 내로라하는 교수, 예술가, 과학자들도 있다. 가난하고 무지하고 나이만 먹은 노인들만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국민의 이러한 비합리성을 보면 광우병 사태나, 촛불 난동,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A4 용지가 없으면 정상회담을 못 하던 임금과 해외 순방길 임금 앞에서 당당히 걷던 풍채 좋은 왕비가 코로나 사태로 가장 큰 혜택을 입어 임기를 무사히 넘기고 양산에 요새 같은 집을 지어 살 수 있는 것과 선거에서 승리한 좌파 세력이 수많은 악법을 만들고 사리사욕을 채워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나랏빚과 개인 빚이 최고로 증가하게 된 것도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어떤 행위를 할 때 그것이 목적과 맞으면 그것을 우리는 이치에 맞는 행동이라고 하고, 맞지 않을 때 ‘비합리’라고 한다. 비합리가 만연하면 사람들은 윤리, 도덕, 법, 규범에 따라 살지 않고 그때그때의 감정이나 강자의 명령 그리고 군중심리에 따라 살게 된다. 낭비와 남용이 많고, 선동에 쉽게 넘어가 집단 광란, 착란이 일어나기도 한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정글같이 되거나, 아니면 모든 사람이 노예처럼 살게 되는 독재국가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사람들은 이렇게 불나방 같은 비합리적인 행동하는 것일까?
사진=인터넷 캡처
첫째는 권위에 대한 복종 때문이다.
스탠리 밀그램(1933~1984, 미국의 사회심리학자)은 나치가 어떻게 수백만을 학살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한 가지 실험을 고안하였다. 그것이 유명한 ‘밀그램의 복종 실험(1963년)’이다.
이 실험은 제시한 문제에 학생이 틀린 답을 했을 때 선생이 전기 충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학생은 연기자였고, 선생은 신문 광고를 보고 실험에 자원한 평범한 남성들이었다. 전기 스위치는 15볼트에서 450볼트까지 올릴 수 있었지만, 모두 가짜였다. 밀그램은 회색 실험실 가운을 입고 틀릴 때마다 옆에서 전압을 올릴 것을 지시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사람들(65%)이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전압인 450볼트까지 올렸다. 학생 연기자는 매우 고통스런 표정으로 그만 올릴 것을 애원하는 연기도 했고 심지어 죽는 연기도 했지만, 선생들은 밀그램의 지시대로 전압을 올렸다. 밀그램은 사람들이 주저하거나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면 정확히 4번 반복해서 계속하라고 지시하고 계속 거부하면 실험을 중단했는데, 이 지시란 것이 특별한 협박이나 설득도 아니고 단순히 "계속하십시오.", "꼭 실험을 진행해야 합니다." "전기 충격으로는 실험자의 신체에 영구적 손상을 주지 않습니다. 실험을 계속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정도였는데도 실험에 참여하여 선생 역할을 한 65%가 그 지시를 따랐다.
이후 이와 유사한 여러 실험이 진행되었지만,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중지되었고, 스탠리 밀그램은 자격정지의 징계를 받았다.
이 실험은 인간의 도덕성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명령을 받아 하는 일이라도 각자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는 기대를 무너뜨렸다.
명령자는 자신이 직접 하지 않기에 책임이 없고, 집행자는 명령받아 하는 행위라 책임이 없는 것이다. 책임 소재가 없는 일에는 도덕과 윤리가 작동하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험이었다. 한국의 학교에서 3년째 자행되고 있는 선생들의 마스크 폭력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애쉬의 동조 실험 (사진=인터넷 캡처)
둘째는 동조 때문이다.
동조는 자신의 생각이 집단의 생각과 다를 때 자신의 생각을 집단의 생각으로 바꾸는 것이다.
동조 실험으로는 1955년의 애쉬(S. Asch)의 실험이 있다.
그는 기준이 되는 끈과 길이가 다른 세 개의 끈을 놓고 여러 명의 연기자로 하여금 기준이 되는 끈과 같은 길이의 끈을 고르라고 할 때 다른 길이의 끈을 선택하도록 하면, 피실험자가 어떤 끈을 선택하는지 보는 것이었다. 피실험자는 눈으로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다수의 연기자들이 선택한 다른 길이의 끈을 선택하였다.
이렇게 사람이 다수에 동조하는 이유는 집단심리학자 체스터 인스코는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경험적으로 다수가 옳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집단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다.
1955년 동조 실험을 진행했던 애쉬는 이렇게 말했다.
"충분한 지적 능력과 판단 능력을 갖춘 젊은이들조차도 기꺼이 흰 것을 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는 우리의 교육 방식과 우리의 행위를 이끄는 가치관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할 수밖에 없다."
사진=인터넷 캡처
셋째는 응종 때문이다.
공적으로 암시된 어떤 요청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속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 요청과 일치되게 행동과 태도를 바꾸는 것을 응종이라고 한다. 백신이 위험하며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맞지 않으면 직장생활에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접종을 하는 것이 응종이다.
백신을 찬성하는 의사 (사진=인터넷 캡처)
넷째는 수용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압력이나 직접적 명령이 존재할 때, 그것이 개인이 보기에도 옳다고 생각되어서 태도와 행동을 기꺼이 일치시키는 것이다. 백신에 대해 스스로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막연히 정부가 국민을 해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여 TV어용의사와 질병청 관리의 말만 믿고, 소수의 의견은 무조건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사회적 압력이 가해면 수용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사진= 세계시민걷기행동연대(세행연) 한국본부
다섯째는 이익은 분명하지만, 처벌은 없거나 아주 경미하기 때문이다.
의사를 비롯하여 백신 접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이 갖는 생각이다. 백신을 맞고 중환자가 되거나 죽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데 그것은 얼마든지 책임을 전가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접종 부작용의 책임을 온전히 의사가 져야 한다면, 어떤 의사도 접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익은 가까울수록, 처벌은 멀수록 죄의식은 작아진다.
오순영 칼럼리스트 /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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