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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맡은 역할이 행동을 결정한다.

진료실은 사회라는 거대한 연극무대의 작은 축소판이다. 진료실 무대에서는 환자라는 배역과 의사라는 배역에 충실한 배우들이 한 편의 연극을 펼친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사의 말을 잘 듣고 의사 마음에 쏙 드는 좋은 환자 배역에 충실하다. 한편 의사는 환자를 잘 낫게 하는 유능하고 친절하며 평판 좋은 의사 배역에 충실하다. 적어도 진료실 안에서는 나쁜 의사, 나쁜 환자의 배역을 맡는 것을 누구도 싫어한다.

환자 없는 의사는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같이 하찮고 쓸모없는 존재다. 환자가 있어야만 의사의 가치가 존재한다. 환자 없는 의사가 된다는 것은 생계 문제 이전에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는 가장 무서운 일이다. 환자는 의사의 요구에, 의사는 환자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무언의 합의가 진료실에서 조성된다. 이에 따라 과잉 친절, 과잉 검사, 과잉 치료의 시나리오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병원의 규모가 크고, 의사의 유명세가 클수록 이 시나리오는 보이지 않는 복종의 거미줄이 되어 환자는 물론이고 의사까지도 이에 따라 움직이는 드라마가 펼쳐진다.

페르소나는 제2의 자아, 혹은 쓰거나 벗는 가면이다. 페르소나는 가정교육, 학교 교육, 직업, 사회 문화, 관습 등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페르소나가 강하면 자아는 약해진다. ‘자아’는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를 의미한다. 자아 상실은 행위의 주체가 자신이 되지 못하고, 타인, 제도, 관습, 상황, 페르소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권위와 권력을 갖게 되는 상황이나,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은 페르소나와 자아를 동일시하거나, 자아를 쉽게 잃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 증명하는 유명한 사회심리 실험이 있다.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과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이다.

스탠리 밀그램은 사람이 어떻게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거대 악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1961년 그는 미국의 예일 대학교에서 하나의 실험을 고안하여 실행하였다. 실험은 참가자에게 “이 실험은 처벌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는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피험자의 65퍼센트가 연구진의 지시에 따라 다른 피험자(실제로는 연기자)에게 연속으로 전기 충격(피험자는 진짜 전기 충격기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가짜였음) 을 가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권위에 복종하여 악을 행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필립 짐바르도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가짜 교도소를 만든 후 평범한 대학생을 임의로 교도관과 죄수로 나눈 후 입소시켜 관찰하였다. 당초 계획은 2주였으나 일주일 만에 중단하고 말았다. 교도관의 가혹 행위와 죄수의 정신쇠약으로 통제 불능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공익변호사, 가톨릭 사제, 가석방 심사관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도 실험임을 잊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실험의 주관자이며 관찰자였던 짐바르도 마저도 교도소 소장처럼 행동하였다.

사람들은 분명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처럼 권위에 복종하며,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처럼 맡은 역할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본래 악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복종하는 다수가 아니라 불복종하는 소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밀그램의 실험에서도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35%가 있었고, 짐바르도의 교도소 실험에서도 가혹 행위를 하지 않는 교도관이 있었으며,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는 죄수도 있었다.

의사 중에도 유전자 백신을 아무 의심 없이, 자동기계가 되어 놔주는 의사가 있고 그렇지 않은 의사가 있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까? 이것은 자아 상실과 실현의 차이다. 즉 인식과 행동의 주체가 자신에게 있느냐 타인에게 있느냐의 차이다. 많은 관념론 철학자들(칸트, 헤겔, 쇼팬하우어 등)을 비롯해 힌두교의 우파니샤드 철학, 불교의 유식설,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혼 불멸설, 플라톤주의의 이데아론, 기독교 신학은 자아실현이 ‘지적 통찰’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런데 의사의 지적 통찰을 방해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의사라는 페르소나다. 의사들 대부분은 몇 평 안 되는 진료실에 갇혀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평생을 산다. 보건소, 의협, 질병청에서 보내온 각종 공문, 정보, 지침, 교육 증명서 요구, 자주 바뀌는 심평원의 심사 기준 등등 의사의 숨통을 조이는 올가미와 순응을 강요하는 채찍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그리하여 의사들은 점점 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동기계가 될 위험성을 많이 갖게 되었다.

지적 통찰을 위해서는 의사라는 페르소나를 잠시 벗고 자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현재 벌어지는 현상을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합리적 사고는 반드시 보편적 상식과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해야 한다. 과학이 만든 허구, 비관적인 예측, 과장된 공포의 개입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합리적인 사유 그리고 누구나 갖고 있는 내면의 선함이 융합되면 깊은 믿음이 생기는데 이 믿음이 지적 통찰이며 이것은 자아실현의 용기를 만들어 준다.

악이 평범하듯, 선도 평범하다. 평범한 악과 평범한 선의 차이는 최종적으로 용기에 달려 있다.

칼럼리스트 / 가정의학과 전문의·코로나진실규명의사회

※ 편집자주

약 1년 전, 본지(本紙)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부득이하게 휴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오순영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칼럼은 편집을 완료했으나, 뉴스사이트 폐쇄로 인해 게재하지 못했습니다. 오는 7월 1일 재창간을 맞아 해당 칼럼을 원문 그대로 게재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점을 참고하여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