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2년 8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 가족들이 가습기 살균제로 희생된 피해자들의 신발 등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더프리덤타임즈 제공)

■ 12년 만에 나온 의미 있는 판결

지난 11월 9일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김 모 씨에게 내린 판결은 폐 질환과 살균제 간 인과관계를 인정받지 못한 피해자가 위자료 받을 길이 열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가습기살균제 사용 후 폐 질환과 관련해 정부 조사에서 ‘3단계’로 판정받은 그가 살균제 제조·판매사 옥시레킷벤키저(옥시)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심을 확정했는데, 3단계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폐 질환 가능성이 작다’라고 판정된 경우다. 3단계 판정자는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뜻하는 4단계 판정자와 함께 초기 정부 지원금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부가 인과성을 부인한 만큼 옥시도 정부가 폐 질환과 가습기살균제 간 인과성을 인정한 1단계와 2단계 피해자에겐 배상했지만, 3단계와 4단계 판정자에 대해선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3단계와 4단계 판정자에게도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계속 나왔다. 특히 “3단계와 4단계 판정자도 폐 질환과 가습기살균제 간 연관성이 확인된다”는 인하대병원 직업환경의학 교실 임종한 교수팀의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배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대법원은 이날 정부의 3단계 판정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말단 기관지 부위 중심 폐 질환 가능성을 판정한 것일 뿐”이라면서 질환 발생·악화와 가습기살균제 인과관계는 “사용자의 구체적인 증명에 따라 유무가 달라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가습기살균제가 질환의 원인인지를 판단할 때 정부의 판정이 ‘절대기준’은 아니라는 의미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병원비만 지원하는 구제를 넘어 정신적, 경제적 피해에 대해 위자료를 포함한 배·보상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긴 판결”이라고 밝혔다.

지난 9월 6일 국회 본관 228호실에서 열린 국민의힘과 질병청의 '백신 피해보상 당정 협의회'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 "'백신 국가책임제'는 윤석열 대통령 후보의 1호 대선 공약이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인과성 문제로 다툼이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백신 부작용 사태 해결에도 원용(援用)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9월 6일 국회에서 국민의힘과 질병청의 ‘백신 피해보상’ 당정 협의회가 열렸다. 당시 국민의힘 박대출 정책위의장은 모두발언에서 “‘백신 부작용 국가책임제’는 윤석열 대통령의 1호 대선 공약이었다”며 “백신과 이상반응 간의 인과관계에 대해 국민의 입장에서 보다 전향적인 기준을 마련해 피해자들의 아픔을 보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코로나19백신이 긴급 승인된 약품이라서 부작용에 대한 충분한 검증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국민이 국가를 믿고 따른 만큼 백신 접종 피해자와 가족이 충분한 보상을 받고 지원받았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어야 국가의 책무를 다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운영 중인 ‘코로나19백신 안전성 연구센터’에서 국내외 연구를 반영해 인과성 인정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며 “관련성 의심 질환의 범위도 연구 결과를 토대로 꾸준히 확대해 인과성에 개연성,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사망 위로금과 질병 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2020년 12월 31일 국회 앞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 비상대책위의 기자회견 모습이다. 이날 본지 정중규 주필(오른쪽 첫 번째)도 함께 했다. (사진=더프리덤타임즈)

■ 가습기살균제 사태 피해자 7천877명, 사망자 1천835명

가습기살균제 사태는 옥시레킷벤키저, 애경산업, SK케미칼 등의 기업들이 1994년부터 2011년까지 확실한 안전 검사도 시행하지 않은 채 독성 성분이 포함된 가습기살균제를 출시하며 벌어진 일이다. 당시 급성호흡부전 환자가 잇달아 발생했는데, 가습기살균제를 자주 사용한 영유아와 임산부, 기저질환자 등에게 폐섬유증이 생긴 것으로 조사돼 이슈화됐다. 가습기살균제 주성분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등은 ‘정부 유해성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흡입독성 평가를 거치지 않은 채 20년 가까이 판매됐다. 이 물질들은 피부에 닿을 땐 문제가 되지 않지만, 흡입하면 위해성을 지니는 것으로 추후 밝혀졌다. 지난 10월 기준으로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피해자만 7천877명이고, 피해자 가운데 이미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 1천835명에 달하는 실정이다.

이런 엄청난 사태가 벌어졌지만, 정부와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그 유가족들이 국회 앞에서 농성과 집회하면서 기자회견 할 때 함께 하면서, 큰소리 내는 이들에겐 귀 기울이고 자신의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이들에겐 무관심한 우리 사회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안타까워하며 분노하기도 했었다.

지난 8월 25일 국회의원회관 제7간담회의실에서 국민의힘 최승재 이종성 의원 주최로 열린 '감염병예방법 개정 및 감염병 관리체계 개선 간담회' 모습 (사진=더프리덤타임즈)

■ 가습기살균제 사태는 코로나19백신 부작용 사태로 이어지고

그리고 다시 그런 일이 재현되고 있는 현장이 코로나19백신 부작용 사태다. 백신피해자치료시민연대 대표 남궁현우 목사의 “문재인 정권의 ‘K-방역’ 하의 ‘백신 패스’ 이후 사망자가 2천6백여 명, 중증 장애자가 2만여 명, 이상반응이 40여만 건이다. 세월호가 8대 침몰하고, 이태원 참사가 17번 일어나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 두 번 이상 터진 규모와 비슷한 대참사가 백신 패스 이후 일어난 것”이라는 절규는,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와 달리 정치권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코로나19백신 부작용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처지를 웅변해 주고 있다.

그들은 백신 접종과 이상반응 간 인과성의 포괄적 인정을 비롯해 ‘치료비 선 지원 후 정산’, ‘코로나19백신 부작용 대책위원회’ 설치와 함께 무엇보다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요구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백신국가책임제’를 약속하면서 “백신 이상반응 소명 자료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예방 접종과 이상반응 간 시간적 개연성이 있으면 백신 피해로 다 인정하기로 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코로나19백신의 불완전성이 컸던 점을 감안해 정부는 인과관계 입증 책임을 완화하고 포괄적 보상을 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백신 피해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지 않는 프랑스, 인과관계 입증을 완화한 독일 일본 대만, 백신 피해를 신속 지원하는 태국 같은 해외 사례를 봐서도 이에 대한 보다 전향적인 자세가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다.

지난 9월 2일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백신부작용진실규명협의회가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 코로나 및 코로나백신 피해자・유가족 요구사항이 담긴 서한을 대통령실에 전달하고 있다. (사진=더프리덤타임즈)

■ 정치는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

지금을 다들 ‘포스트코로나 시대’라고 하지만, 국가를 믿고 백신 맞았다가 피해 입었고, 증상과 상황, 증거 등이 모두 있지만 인과성 입증이 어렵다는 이유로 외면당하는 백신 피해자와 가족들, 그들은 여전히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을 끝내 외면한다면 코로나19로 인해 아픈 것보다 국가에 대한 배신감으로 더한 아픔을 느낄 것이다. 일찍이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정치란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라 했다. 사람이 눈물을 흘릴 때란 기뻐서도 그럴 수 있지만, 대개는 아프고 슬퍼서이다. 국민이 아파하고 슬퍼하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그 눈물을 대통령은 닦아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