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대 도서관 소장 19세기 한국어 동사 활용문법서
영국 옥스퍼드대 보들리언 도서관이 소장한 1896년 한국어 동사 활용 문법서 '동사 하다의 종결형'(Terminations of the Verb Hada) 표지. 주영한국문화원은 오는 17일(현지시간)부터 열리는 전시 '염화미소'에서 '하다'를 포함한 영국 소장 한국 문화유산의 디지털 이미지를 일반 공개한다.사진=보들리언 도서관.연합뉴스
‘하다’ 동사의 800여 가지 활용형을 한글과 영문으로 풍성히 정리한 19세기 말 희귀 문헌은 영국 옥스퍼드대 보들리언 도서관에서 새롭게 조명된다.
6일(현지시간) 학계에 따르면 1896년 출간된 ‘동사 하다의 종결형(Terminations of the Verb Hada)’은 가로 17㎝, 세로 21㎝, 총 116쪽으로 구성된 문법서로, 개화기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의 한국어 초기 연구사를 보여주는 세계 유일본이다.
책 표지에는 ‘비공개 열람용’이 찍혀 있어 다량 유통되지 않았으며, 현재 보들리언 도서관 소장본만 존재한다.
옥스퍼드대 도서관 소장 19세기 한국어 동사 활용 문법서
영국 옥스퍼드대 보들리언 도서관이 소장한 1896년 한국어 동사 활용 문법서 '동사 하다의 종결형'(Terminations of the Verb Hada) 제1쪽과 116쪽. 주영한국문화원은 오는 17일(현지시간)부터 열리는 전시 '염화미소'에서 '하다'를 포함한 영국 소장 한국 문화유산의 디지털 이미지를 일반 공개한다.사진=보들리언 도서관.연합뉴스
이 문헌은 ‘하다’의 활용형 하나당 영어 정의, 한국어 예문, 영어 번역을 제시하며, 교착어인 한국어의 어미 변화가 동사의 기능, 의미, 화자·청자 관계를 결정짓는 점을 외국인에게 세세히 알린다.
예를 들어 ‘하거니말거니’는 ‘Whether one does or not’, ‘하리오’는 ‘How to do’로, ‘엇지하리오’는 ‘How shall I do’로 정의된다. ‘하옵고’는 ‘Polite reply from an inferior to a superior(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공손한 답)’, ‘한들’은 ‘In spite of being done’으로, ‘설워한들슬데잇나’는 ‘Though you sorrow you sorrow in vain’으로 번역된다. ‘하시오이다’는 ‘Please do’, ‘하여시면’은 ‘If you do’, ‘하엿겟시닛가’는 ‘Would it have been done’, ‘할지어다’는 ‘Let it be done’으로 설명된다. 이는 영어의 고립어 특성과 대비되며, 영어권 화자의 한국어 학습 난점을 드러낸다.
옥스퍼드대 소장 19세기 한국어 문법서 연구한 사서와 한국문화원장
19세기 한국어 동사 활용 문법서 '동사 하다의 종결형'을 연구한 하니 라일리 옥스포드대 위클리프홀 도서관장 겸 얀튼매너 라니어 신학 도서관장(오른쪽)과 선승혜 주영한국문화원장이 올해 6월 이 책이 소장된 영국 옥스퍼드대 보들리언 도서관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선승혜 문화원장.연합뉴스
한국계인 하니 라일리 옥스퍼드대 위클리프홀 도서관장 겸 얀튼매너 라니어 신학 도서관장은 “’하다’라는 동사 하나만 심층적으로 분석한 특별한 책”이라며 “깊이 있는 지식을 얻고자 하는 비(非)한국어 화자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저자의 상당한 한국어 지식과 언어적 능력을 유추할 수 있다”고 밝혔다.
문헌은 19세기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한 영국성공회 조선교구와 밀접히 연계된다.
표지 제목 아래에는 ‘루멘(Lumen)에 나오는 동사 종결어미 일부를 때때로 참조하여’라는 부제가 달렸으며, 여러 활용형에 ‘루멘의 몇 장 몇 절을 보라’는 설명이 붙는다.
‘루멘’은 대한성공회의 초기 성서인 조만민광(照萬民光·Lumen ad Revelationem Gentium)을 가리킨다.
조만민광은 초대 성공회 조선교구장 찰스 존 코프(고요한) 주교가 1891년 조선에 인쇄기를 들여와 인쇄소 운영을 시작한 뒤 1894년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편찬한 한글·한문 병용 발췌 성경이다.
제3대 조선교구장 마크 트롤로프 주교가 조만민광 편찬에 참여했으며, 여러 문서에서 이를 ‘루멘’으로 칭했다. 문헌은 조만민광 구절을 활용형 설명에 인용한다.
라일리 관장은 “조만민광이 출판되고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다’가 출간됐다”며 “트롤로프 주교는 여러 언어에 능통한 언어 천재였으며, 그의 언어학적 노력이 초기 한국학의 근간을 세웠다”고 평가했다.
이 문헌은 2008년 몬시뇰 리차드 러트 신부가 기증한 약 2천권 책에 포함돼 보들리언 도서관에 입수됐다.
2011년 한국 정부 지원으로 출간된 ‘한국의 보물(Korean Treasures·민 청)’에 소개됐으나, 학계와 대중 인지도는 미미하다.
주영한국문화원은 오는 17일부터 전시 ‘염화미소:인공지능과 문화유산’에서 이 문헌을 포함한 영국 소장 한국 유산을 디지털 이미지로 공개한다.
AI 기술을 활용해 한글·영문 텍스트를 고화질로 제공하며, 한국어의 구조적 독창성을 알린다.
선승혜 문화원장은 “단순한 한글 문법서를 넘어 ‘하다’ 앞에 명사만 붙이면 수많은 일이 가능해지는 한국어의 구조와 한국인의 사고 구조를 간파한 책”이라며 “한국의 역동성이 ‘하다’라는 동사로 압축해 드러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미학의 관점에서 이 문헌을 조명하며, AI를 통해 세계에 한국의 문화적 깊이를 알린다”고 밝혔다.
이 문헌은 개화기 외국인의 한국어 학습 난점을 보여주며, 한국어의 언어적·문화적 가치를 세계에 전하는 소중한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