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확대 행정명령 서명한 트럼프 대통령.사진=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자국의 원자력 발전소 확충을 위해 시공 능력이 뛰어난 한국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우리 정부에 강력히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한국 원전 산업의 미국 시장 진출에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며, 오는 25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주요 의제로 다뤄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통상 소식통에 따르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진행된 한미 에너지 당국 간의 접촉에서 미국 고위 당국자들은 자국 내 원전 확대 계획을 소개하며 한국 기업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미측은 한국 기업들의 참여를 바라는 이유로, 지난 1월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 간의 지식재산권(IP) 분쟁이 해소되었고, 양국 정부 간에도 엄격한 수출 통제 원칙 준수를 바탕으로 원전 협력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 한국이 제3국 시장보다 원전 확충 문제가 더욱 시급한 미국에 직접 와서 원전을 건설해주기를 바라는 취지로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화석연료 경제 부활과 함께 원전 산업의 대대적인 확대를 주요 에너지 정책으로 삼고 있다.

그는 2050년까지 현재 약 1백기가와트(GW) 수준인 원전 설비 용량을 4백기가와트(GW)까지 늘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는 기존 용량에 3백기가와트(GW)를 추가하는 것으로, 1기가와트(GW)급 원전 약 3백 기에 달하는 막대한 물량이다. 아울러 신규 원전 인허가 기간도 18개월로 대폭 단축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당장 2030년까지 10기 원전 착공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업계는 이마저도 전례 없이 많은 물량이라 사업자 선정부터 자금 조달, 실제 착공까지 상당한 도전 요인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한국에 사실상 도움을 요청하는 배경에는 자국 내 공급망 붕괴라는 심각한 현실이 자리한다.

미국은 원전 설계 등 핵심 원천 기술 강국이지만,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신규 건설 인허가가 장기간 중단되면서 자국 내 건설 및 기자재 공급망이 사실상 무너졌다.

웨스팅하우스처럼 원천 설계 기술을 보유한 기업도 실제 대규모 원전을 시공할 역량이 부족해 마치 '팹리스 기업'과 같은 상황이다. 따라서 대규모 원전 건설을 주도할 사업 파트너가 절실하다.

미국이 공백을 겪는 사이 세계 원전 시장에서 영향력을 키운 러시아나 중국 기업을 제외하면, 자체 공급망을 갖추고 해외에 진출해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종합 시공 능력을 보유한 국가는 프랑스 전력공사(EDF)가 있는 프랑스와 한국 정도뿐이다.

이 같은 상황은 미국이 자국 내 공급망 문제로 한국 조선업에 협력을 기대하는 마스가(MASGA) 프로젝트와 유사하여, 이번 원전 협력 또한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는 합작회사 설립을 통해 미국 등 주요 원전 시장에 공동 진출하기 위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 중이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지난 19일 국회에서 "유럽 시장보다는 미국 시장을 겨냥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양측은 출자 규모와 비율, 사업 대상 등을 조율하고 있으나, 아직 합의 단계에는 이르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양사 간의 지재권 분쟁 해소 합의문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한수원과 한국전력이 유럽연합(EU) 등지 진출을 포기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불거져 '불공정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합작을 통한 공동 사업의 경우, 과거 각사가 단독 수주를 추진할 때와 달리 수주 지역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전 업계에서는 합작이라는 우회적인 방식을 통해 한국이 시도조차 못 했던 미국 시장 진출 길이 열린다면, 건설 및 기자재 등 한국 원전 기업들에게 전례 없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크다.

한 소식통은 "미국은 단가도 가장 높고 제3국 수출을 위한 승인 절차도 필요 없어, 진출하기만 한다면 우리 원전 산업에 있어 '드림 솔루션'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합작법인 설립이 성사되더라도, 지분 비율 등에서 한국이 주도권을 웨스팅하우스에 내주게 된다면 '제2의 굴욕 협상'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히 제기된다.

실제 현재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는 사업 주도권 등 세부 내역에서 여전히 견해차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에너지 공기업 관계자는 "거대한 시장 진출 기회를 기대할 수 있지만, 지분 비율 등에서 불리한 조건을 받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재명 대통령(왼쪽)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사진=연합뉴스


한편, 트럼프 행정부가 원전 확대 목표 달성을 위해 한국의 역할을 기대하는 상황에서 오는 25일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원전 협력 방안이 주요 의제로 오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양국은 관세 협상 타결 과정에서 한국이 원전 분야를 포함해 2천억 달러 규모의 투자 지원 패키지를 조성하기로 이미 합의한 바 있다.

이에 반도체, 이차전지, 조선 등 전력 산업 협력 논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원전 협력이 구체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