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 부산에서 국무회의 주재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3일 부산 동구 해양수산부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재명이 내란을 통해 대통령직을 꿰찬 자이긴 하지만 그가 대통령 자리에 있는 한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이재명 정치의 본질적 문제는 유능하냐, 무능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다.

국가 운영을 제도와 시스템의 문제로 보느냐, 아니면 개인의 결단과 개입의 문제로 보느냐의 차이다.

이재명이 스스로를 지도자로 규정할 때 떠올리는 모델은 선비형 박학다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아전형 잡학잡식에 기반한 만기친람의 오래된 유혹에 가깝다.

만기친람의 한계(AI가 만든 이미지).사진=더프리덤타임즈


◆ 만기친람의 실패 공식

만기친람은 동아시아 정치사에서 반복되어 온 실패의 공식이다.

최고 권력자가 모든 사안에 직접 개입하고, 모든 보고를 자신에게 집중시키며,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직성이 풀리는 통치 방식이다.

겉으로는 열심히 일하는 지도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도의 숨통을 조이고 조직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질식시키는 방식이다.

국정은 개인의 성실함이나 기민함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그것은 업무 분장, 책임의 위계, 상호 견제와 신뢰라는 제도적 장치 위에서만 작동한다.

대통령은 방향과 철학을 제시하고, 장관은 정책을 설계하며, 국장과 과장은 집행과 조정을 맡는다.

이 구조가 무너지는 순간 국정은 혼란으로 치닫는다.

“대통령이 장관의 일을 하고, 장관이 국장의 일을 하며, 국장이 과장의 일을 하면, 그 끝은 늘 같다. 책임은 사라지고 사고만 남는다.”

이재명 대통령, 충남 타운홀미팅 발언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5일 충남 천안시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서 열린 '충남의 마음을 듣다' 타운홀미팅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국정과 지방행정의 근본 차이

이재명의 정치적 이력은 이러한 구조적 위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수십만 박사 시대에 그의 학력은 기껏 학부 졸업에 그친다.

법대 진학 이후에도 다양한 학문을 탐구하기보다는 사법시험 준비에만 전력을 기울였던,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수험 법학’ 경로를 밟았다.

이 과정에서 장기적인 인문학적 사유나 역사적 상상력을 축적할 시간과 기회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대학이라는 학문의 전당에서 학문을 한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지식 훈련에 몰두한 셈이다.

여기에 더해 그는 소년공으로서 제도권 밖의 삶을 경험했고, 이후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로서 단체장 행정을 수행했다.

이 경험은 분명 그를 강단 있고 실행력 중심의 행정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국정은 단체장 행정의 확대판이 아니다.

지방행정은 비교적 제한된 영역에서 강한 리더십과 속도감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반면 국정은 외교, 안보, 금융, 산업, 과학기술, 문화, 교육이 복합적으로 얽힌 고차 방정식이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내가 다 안다'는 확신이 아니라, '내가 다 알 수 없다'는 자각이다.

그러나 이재명은 이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이해를 넘어서는 영역에서도 과도한 확신과 공격적 개입을 서슴지 않는다.

정부 부처와 산하기관을 향해 공개적인 훈계와 질책을 반복하고, 임명권자라는 이유만으로 고위 관료나 산하기관장들을 하급 실무자처럼 대한다.

이것은 리더십이 아니라 권력의 오만이다.

<독재자가 되는 법>은 20세기 대표적인 독재자들을 ‘개인숭배’ 관점에서 조명한다. 아돌프 히틀러가 1925년 자신의 연설 녹음을 들으며 리허설을 하고 있다. 히틀러는 전속 사진사였던 하인리히 호프만에게 원판을 없애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거역했다. 1959년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마오쩌둥. 그의 인자한 이미지 때문에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1981년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일성 초상화를 배경으로 노래하는 합창단. 그는 정적을 물리치고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왼쪽 사진부터). 열린책들 제공


◆ 권력 오만의 역사적 교훈

역사는 이러한 유형의 지도자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1941년 이후 군사 작전에 직접 개입하며 참모진의 전문적 판단을 무시했고, 그 결과 독일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치명적 패배를 맞았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에서 모든 정책을 자신의 직관과 이념에 맡겼고, 보고는 왜곡되었으며 수천만 명이 아사했다.

푸틴 역시 우크라이나 침공 과정에서 듣고 싶은 보고만 받았고, 그 결과는 장기 소모전이었다.

만기친람은 언제나 보고의 왜곡과 조직의 침묵을 낳는다.

해방 직후 북한 군정 시기의 스티코프 중장을 떠올려 보자.

소련군 중장이었던 그는 점령군의 권력으로 김일성을 교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은 점령지가 아니다.

“이재명 정부의 장·차관과 산하기관장들은 각 분야에서 수십 년간 훈련된 엘리트들이다.

상당수는 대통령 개인보다 더 깊은 전문성과 국제적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타운홀 미팅이라는 형식으로 산하기관장들을 대규모로 동원해 공개 질책을 가하는 장면은 참담하다.

이는 소통도, 개혁도 아니다. 권력을 과시하는 의식일 뿐이다.

토론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침묵과 복종뿐이며, 그렇게 길들여진 조직은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무너진다.“

대통령의 가장 큰 덕목은 지식의 총량이 아니다.

사람을 쓰는 능력이다. 겸손하게 위임하고, 책임 있게 신뢰하며, 필요할 때는 물러날 줄 아는 용기. 이것이 민주국가 지도자의 조건이다.

한 치밖에 되지 않는 지식과 경험을 과시하려는 태도는 결국 열등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왜 다수의 국민이 이러한 콤플렉스의 포로가 되어야 하는가.

그를 선택하지 않은 국민에게 이는 거의 폭력에 가깝다.

조선 왕조를 설계했던 정도전 같은 박학다식의 지도자가 이 장면을 본다면 기가 막힐 일이다.

지식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권력을 절제하기 위한 무기다.

이재명은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이제는 정신 차릴 때다.

※ 본 기고는 필자가 SNS에 게시한 글을 토대로 구성되었으며, 필자의 요청에 따라 실명은 비공개 처리하였습니다. 본문 내용은 필자 개인의 견해로서, 본지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