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제공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에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로마 이후 가장 많은 철학자를 배출하였고 종교개혁의 발원지였던 독일에서 어떻게 나치즘이 탄생하였는지, 어떻게 저항 없이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되었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코로나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상당히 의미심장한 책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자유로부터 도피한 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시민에게 자유는 곧 불안이다. 개인은 광활한 대지에 홀로 남겨진 외로운 양이다.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과 수많은 유혹, 그리고 그에 따른 시행착오의 두려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시민은 자유를 포기하게 된다. 자유라는 것은 위협이고 목숨을 건 도박이다. 아무것도 확신 할 수 없는 불확실이며, 다른 사람의 자유는 또한 내게 실존하는 위험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완벽하게 예측 가능하게 되고, 강제로라도 자신과 비슷하게 되어 결코 자신의 이해관계와 충돌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게 닥칠 위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여 강제로라도 순한 양을 만드는 편이 낫지 않을까? 사람들에게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자신에게 너무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아닐까?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자유가 없다면, 내 자유도 기꺼이 포기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자유도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나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으니 나를 해롭게 할 가능성이 다분한 다른 사람의 자유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커다란 불안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무의식에 점점 쌓인다. 이렇게 하여 시민들이 자유에 지치고, 자유를 두렵게 여기게 되어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된다.
인터넷 캡처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 도피하는데 네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하였다. 마조히즘, 사디즘, 네크로필리아, 그리고 기계적 획일성이다. 마조히즘은 자기 외부의 강력한 힘에 복종함으로써 혼자서는 견딜 수 없는 고독감과 무력감 그리고 허무감을 극복하려는 시도다. 사디즘은 프롬에 의하면 살아 있는 생명체를 절대적으로 지배하려는 열정이다. 폭군이 지배하던 절대 왕권시대 뿐 아니라 현대에도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지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어린아이, 감옥의 수감자, 요양병원이나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가난하거나 무연고자 환자, 학교의 학생 등이다. 그들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괴롭히고 지배하여 자유로부터 도피한다.
네크로필리아는 파괴를 추구하는 것이다. 파괴적인 인간은 상식이나 도덕보다는 ‘법과 질서’를, 자발적인 방법보다는 관료적인 방법을, 독창적이거나 개성 있는 것보다는 획일적인 것, 인간적인 것보다 비인간적인 것을 더 좋아한다. 이들은 타인의 생명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도 가볍게 여긴다. 그들의 용기는 죽음을 향한 용기다. 극단적인 예가 러시안룰렛이다. 프롬에 따르면 지루하고 아무런 활기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거대 조직 속의 부속에 불과한 사람이 이러한 도박을 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파괴적인 인간은 일반적으로 표정이 없다는 특성을 보인다.
마조히즘은 자신이 복종하는 대상에 대한 충성, 사랑, 혹은 의리로 미화되고 합리화되며, 사디즘은 자신이 지배하는 대상에 대한 보살핌, 배려, 교육으로 미화되고 합리화된다. 마찬가지로 파괴성은 파괴성으로 인식되지 않고 인류애, 애국심, 의무, 양심으로 미화된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인류 전체를 위한 것으로 합리화 한 것처럼 말이다.
기계적 획일성은 나치의 독일인뿐 아니라 대다수 현대인이 자유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다. 이는 인간이 자동기계처럼 되는 것이다. 즉 사회가 요구하는 생각과 행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서 수천만의 국민이 마치 한 사람처럼 되는 것이다. 이로써 나와 타인 사이의 갈등은 사라지며, 고독감과 두려움, 그리고 무력감도 소멸된다.
전체주의 국가, 공산국가에서는 국민을 자동기계로 만들기 위해 공포정치, 우상화, 테러가 사용되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암시, 선전, 광고로 형성된 여론과 관행 그리고 법이 사용된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사진=인터넷 캡처)
자신을 스스로 아나키스트라고 부른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1809-1865)은 『19세기 혁명의 보편적 이념』이라는 책에서 국가로부터 통치당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통치된다는 것은 감시받고, 통제되고, 염탐당하고, 좌지우지되고, 법을 강요당하고, 제어되고, 감금당하고, 세뇌당하고, 형벌을 받고, 세금을 부담하고, 평가당하고, 점검받고, 명령을 받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을 능력도, 학식도, 덕도 없는 존재로부터 당한다. 또한 통치된다는 것은 모든 활동이 기록되고, 등록되고, 검열되고, 산정되고, 소인이 찍히고, 측정되고, 등급이 매겨지고, 특허받고, 경고받고, 허가받고, 인가되고, 추천받고, 고삐에 매이고, 개선되고, 교정되는 일이다. 또 공익이라는 구실과 전체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세금이 부과되고, 행정 처분을 받고, 횡령당하고, 착취당하고, 요구당하고, 수탈당하고, 기만당하는 일이다. 또 미미한 저항과 불평 한마디에도 억압당하고, 처벌당하고, 비방당하고, 고통당하고, 박해당하고, 감옥에 투옥되고, 살해당하고, 배반당하고, 모욕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부이고, 정부가 말하는 정의이고 정부가 말하는 도덕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20월 9월11일 충북 청주 질병관리본부 긴급상황센터에서 정은경 초대 질병관리청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1일 충북 청주 질병관리본부(현재 질병관리청) 긴급상황센터를 직접 찾아 정 청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는데, 이와 관련한 글이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왔다. 청원인은 '소상공인은 위험하다고 영업정지해서 다 죽어가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밀접해서 모여도 되나요?'라는 제목의 글에서 "질본의 청 승격과 중수본·중대본의 노고를 격려하기 위해 대통령님이 내려간 것 소상공인들은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하지만 코로나19 방역 심각이라는 빨간불이 켜진 곳에서 모두가 거리 유지도 없이 몰려 격려하는 장면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라고 지적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19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치기 전 프랑스의 아나키스트가 표현한 국가 통치의 적나라한 모습은 21세기 코로나 판데믹이 몰아친 한국의 통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21세기의 통치 수단은 19세기에 비해 조금 덜 거칠고 덜 폭압적이지만, 더 정교하고 세련되었으며 더 촘촘한 그물 같아 국민인 이상 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에서 더 무자비하다.
코로나시기를 겪으며 분명히 알 수 있게 된 것은 과거인은 국가 권력의 지배만 받았다면 현재인은 국가 권력은 물론이고 기술과 자본을 독점하고 있는 대기업, 더 나아가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세계적 세력으로부터 이중 삼중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태어난 후부터 죽을 때까지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지배할 수 있으며, 우리를 각자의 본성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유로부터 도피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악마가 재등장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오늘도 거리, 지하철, 버스에는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자살률이 세계 최고이고, 세월호 할로윈인 참사로 허망하게 수백 명의 어린 생명이 죽어 나가는 나라에서 백신 접종률과 마스크 착용률이 세계 최고인 것은 비수처럼 날카롭게 파고드는 아이러니다.
전국학부모단체연합 등 60여 개 단체가 지난 2021년 12월9일 충북 오송 질병관리청 앞에서 청소년 방역 패스 철회 등을 요구하는 항의 집회를 열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스피노자는『신학-정치학 논고』에서 이렇게 썼다. ‘국가의 목적은 이성적 존재인 인간을 동물이나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위협을 받지 않고 온전히 그 힘을 발휘하게 하고 인간이 자유로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며, 증오나 분노나 술책으로 인해 서로 싸우거나 적대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국가의 진정한 목적은 자유다.’라고.
국가는 코로나 판데믹 같은 비상사태에서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국민이 자유로부터 도피하기 때문이다. 자유로부터 도피한 국민이 대다수가 되었던 나치 독일과 러시아 공산혁명에서 수백만 명이 학살된 홀로코스트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국가의 명령에 무비판적으로 복종하는 자, 자신보다 약한 자를 지배하려는 자, 열등한 민족은 죽어도 된다는 파괴적인 자, 사회가 요구한 대로 따라 하는 자동기계화 된 자들이 대다수가 된 지금의 한국에서 과연 홀로코스트가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혹시 지금 조용히 진행 중은 아닐까?
오순영 칼럼리스트 /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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