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삼일절 광화문 광장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반대집회.사진=연합뉴스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은 필자와 같은 기수(64기)의 공군학사장교였다.

1972년 대학 졸업 후 3월 공군에 입대하여 사관후보생 교육을 수료하고 그해 8월 1일 자로 공군 소위로 임관한 동기였다.

그때 전국 각 대학을 졸업한 360여 명의 후보생이 대전 유성 기술교육단에 입소하여 5개월간 초급 장교로서의 기초 교육을 함께 받았다.

그중 필자를 비롯한 일부는 훈련 수료 후 소위로 임관하여 대위까지 복무할 예정이었으며, 김홍일 후보생을 포함한 대다수는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까지 복무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소규모 구대로 나뉘어 생활했는데, 김홍일과 필자는 5구대 소속 같은 내무반에서 훈련소 생활을 함께했다.

◆ 풀리지 않는 의문, '빨갱이의 아들'이 장교로?

지금에 와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김홍일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나중에 언론을 통해 신민당 총재 김대중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그때 그 친구가 바로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필자와 김홍일이 동일한 연병장에서 소위 계급장을 어깨에 단 임관식 날, 김대중은 일본에 망명 중이었으므로 임관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필자가 김대중의 정체를 알게 된 뒤에 가진 의문은 어떻게 '빨갱이의 아들'로 불리던 이가 공군 장교 신원조회를 통과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중앙정보부에서 실시한 장교 후보생의 신원 조회에서 김대중의 사상을 몰랐을 리 만무한데, 당시 360여 명의 장교 중에서 단 한 명의 '불온한 사상'을 가진 친인척도 없었을 텐데 유독 김대중의 아들만은 예외였을까?

짐작건대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이었고,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은 나중에 김대중 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냈으니, 이들 간에 모종의 정치적 연결고리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만 해본다.

◆ IMF 위기 탈출과 김대중의 '탁월한 천재성'

김대중의 가장 큰 업적은 대한민국이 외환위기, 즉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 구제금융 체제에서 탈출한 것이다.

김대중 전임자인 김영삼 정권 말기에 닥친 외환위기로 인해 한보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한보그룹 전체가 부도 처리되었고, 이는 국내 대기업과 중소기업, 은행, 대학 등의 연쇄 도산으로 이어져 국가 부도 사태에 이르렀다. 결국 1997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체제를 선언하게 되었다.

이후 1998년 2월 24일 김영삼 대통령이 퇴임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국내 사정은 경제적 실권이 국제통화기금에 장악된 비참한 상태였다.

1988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대한민국은 노태우, 김영삼 정권 10년 동안 방만한 경제 운용으로 5백50억 달러의 채무를 지게 되었고, 우리 자체적 가용 외환 보유고는 62억 달러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이 정부로부터 국민에게 알려짐과 동시에 대한민국은 전 방위적인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돈 될 만한 기업과 산업 시설은 모두 해외에 매각되었고, 종업원은 정리 해고를 당하며 지옥을 방불케 하는 고통이 따랐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자구적 노력은 세계를 감동시켰다. 이른바 '금모으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70년 전 1907년 대구 민간인들에게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정신이었다.

그 결과 정부와 민간의 각고의 노력 끝에 1998년 12월, 국제통화기금 긴급 보관 금융에 1백8억 달러를 상환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금융 위기로부터 서서히 벗어났다.

마침내 2000년 12월 4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하였고, 우리 대한민국이 국제통화기금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선언하였다.

◆ '애국심'을 삼켜버린 망국적 여파

이 과정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탁월한 천재성'이 발휘되었다. 그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자신의 영달과 사리사욕 추구, 그리고 북한과의 공산주의화 통일 여건 조성에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외적으로 북한을 두둔하며 '햇볕정책'을 써서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북 송금을 적극 장려했고, 사실상 북한의 핵무장을 지원하면서도 겉으로는 "북한은 핵을 만들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했다.

필자는 이러한 김대중의 일련의 노력과 성과를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김홍일이 군에서 훈련소 생활을 함께한 "전우"이기 때문에 김대중의 활동을 우호적으로 보아왔었다.

그러나 그를 비판적으로 보게 된 동기는 그의 재임 중 국제통화기금를 탈출한 뒤에 생긴 '망국적 여파' 때문이다.

그는 대한민국을 부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대한민국이 가진 모든 자산을 해외에 팔아 돈을 만들어야 함을 국민들에게 인식시켰고,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이 생명처럼 소중히 여겨온 "동포애"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도록 종용했다는 비판이 있다.

"우리가 남이가" 하면서 굶어도 같이 굶고 살아도 같이 잘 살자는 '동포애 정신'이 김대중 집권 이후 사라졌다는 것이다.

김대중 집권 후 전 국민이 총궐기하여 "애국심"을 발휘하여 자신이 가진 금붙이와 보석 패물들을 모두 나라에 바쳤다.

국민들은 "애국심"을 바쳤으나, 김대중은 그 "애국심"을 '똘똘 말아 쌈을 싸서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결국 특정 기간 이후 "애국"과 "애국심"이라는 단어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는 것이다.

◆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애국심'

미국은 초등학교 입학 시기부터 미국 역사 교육을 통한 "애국심" 고취에 주력하고 있으며, 미국민에게 있어서 애국심은 생명처럼 여겨진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세우신 하느님 백성의 나라 국민으로서 세계 어디에 있든지 자신들의 회당에서 어릴 적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들의 정체성 교육을 받고 이를 애국 활동에 옮기고 있지 않은가? 따지고 보면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이가 다들 자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뭉친다.

스포츠 경기에서 이것이 뚜렷하게 드러나며, 모든 분야에서 개인의 영광을 국가의 영광으로 돌리는 마음이 모두 "애국심"에 기인한다.

우리 대한민국이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불타던 애국심이 식어갔다는 평가가 있으며, 특정 시기 이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러나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서 그 애국심이 다시 돌아왔다는 평가가 있다.

태극기와 애국심은 일란성 쌍둥이로서 세계 어디에서든 태극기 물결이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애국심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애국가"를 합창하면서 가슴속으로부터 뜨거운 애국심을 느낀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 "애국심"이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애국심은 우리를 보우하시는 하느님께 닿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자랑스러운 민족으로서의 애국심을 더욱 확고히 견지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