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국회 앞에서 시위하는 은퇴자
지난 8월 13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국회 앞에서 시위하는 은퇴자가 '(대통령) 거부권에 반대. 우리의 가난은 당신의 재정 흑자. 밀레이 사기꾼'이라는 문구가 적힌 푯말을 들고 있다. 아르헨티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연금 인상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한 후, 아르헨티나 은퇴연금 수령자들은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꾸준히 이어왔다.사진=연합뉴스

아르헨티나의 밀레이 정부가 수도권인 부에노스아이레스주 지방선거에서 야당에 13퍼센트(%) 포인트 차로 참패하며, 정치권에서는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The economy, stupid)라는 1992년 미국 대선 구호가 다시금 회자되고 있다.

유권자 40퍼센트(%)가 집중된 핵심 지역에서의 이변 없는 대패는 밀레이 대통령의 직접적인 유세 참여에도 불구하고, 경제 문제가 민심 이반의 결정적 요인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최근 현지 언론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문구는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 진영에서 사용한 것인데, 이번 유권자의 40퍼센트(%)가 집중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밀레이 정부가 새겨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고 보도했다.

정치 분석가들은 밀레이 대통령의 친여동생 뇌물수수 의혹 등 대규모 악재가 터졌으나, "이는 패배의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고 분석하며, 유권자의 마음을 돌린 주된 이유가 '경제'에 있음을 한목소리로 지목했다.

2023년 말 취임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은 당시 물가 안정화와 경제 회복을 약속하며 일부 물가 안정과 재정 건전성 면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민생과 직결되는 내수 경기 침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국민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아르헨티나 국민 대다수는 월급만으로는 한 달을 버티기 어렵다며 "월급이 충분하지 않다"고 응답한 비율이 63퍼센트(%), "지난 6개월간 개인 경제 사정이 악화했다"는 답변이 65퍼센트(%)에 달하는 등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현지 일간 클라린과의 인터뷰에서 경제학자 기예르모 올리베토는 "아르헨티나 국민의 70퍼센트(%)가 매달 쓸 돈이 20일 전에 바닥이 나고, 스스로 '간헐적 빈곤층'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버스 기사이자 우버 기사로 투잡을 뛰는 오마르 씨(57)는 국내 기간 뉴스 통신사인 연합뉴스에 "수십 년을 버스 기사로 일하고 한 번도 다른 부업을 가진 적이 없는데, 지금은 월급으로는 살 수가 없어서 일이 끝나면 우버 기사로도 일하고 있다"며 절박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는 경직된 재정 긴축 정책이 서민들의 삶에 얼마나 큰 부담을 지우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밀레이 대통령은 지방선거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경제 노선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재정 균형을 지킬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시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JP모건, 모건 스탠리 등 주요 글로벌 투자 은행들은 지방선거 패배가 아르헨티나 환율 체계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경기 침체를 심화시키며, 물가상승률 기대치를 높일 것이라고 우려했고, 시장은 즉각 환율 폭등, 주가 하락 등의 수치로 화답했다.

현지 매체 디아리오아르는 14일(현지시간) 칼럼을 통해 "현재 아르헨티나에서는 밀레이 정부가 코너에 몰려있고 가진 카드가 별로 없다는 가설이 널리 퍼져있다"고 지적했다.

경제학자들은 밀레이 정부가 물가 억제를 위해 낮은 환율을 유지하는 대신 경기 침체나 불황을 선택했으며, 달러 환율 안정을 위해 선거 전 금리를 대폭 인상했으나, "이는 미약한 경제 회복세를 무산시킨 결과를 초래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더욱이 환율 변동성으로 수입은 급증하고 수출은 어려워지면서 노동시장과 경상수지가 악화되는 악순환이 시작되었다는 분석이다.

가장 큰 문제는 부족한 외환보유고인데, 밀레이 정부는 이미 2024년 대규모 자금양성화(블랑케오)를 실시했으며 지난 4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200억 달러(약 27조8천8백억 원)의 차관을 빌려왔음에도 환율을 방어하고 연말까지 외채를 상환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는 밀레이 정부가 명백한 위기에 봉착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중도우파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처럼 '라스푸틴' 같은 주변 인사를 정리하고, 과감한 정책 변경과 핵심 기능의 일부 위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으나, 지난 일주일간 밀레이 대통령은 그러한 변화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