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구치 교수 노벨상 수상 알리는 요미우리신문 호외
사카구치 시몬 오사카대 명예교수가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지난 6일 도쿄에서 관련 소식을 전하는 요미우리신문 호외가 배포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일본인 학자가 노벨생리의학상과 노벨화학상을 연이어 수상하며 일본 열도는 다시 한번 자국 기초과학의 위대함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이미 30명에 육박하는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세계적인 과학 강국의 위상을 확고히 한 일본의 쾌거는 이제 놀라운 뉴스조차 아니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어떤가. 기초과학 분야에서 단 한 명의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언제까지 '운이 없을 뿐'이라며 변명할 텐가. '경제 선진국'이라는 허울 좋은 수사에 가려, 자유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기초과학의 위기를 외면하는 우매함은 이제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일본의 노벨 과학상 독주는 결코 우연이거나 단순히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들의 성공 뒤에는 150년이 넘는 꾸준하고 일관된 기초과학 투자와 지원이라는 확고한 원칙이 있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래 서구의 선진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눈앞의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않는 장기 연구 지원 시스템을 확립한 것이 핵심이다. 3년에서 5년 단위의 안정적인 연구비 지원, 심지어 유사한 주제로 지속 연구 시에는 지원 확률을 높이는 제도적 장치까지 마련하며 연구자들이 긴 호흡으로 인류 난제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인내와 지원 속에서 연구자들은 조급증을 버리고 인류의 지평을 넓히는 위대한 발견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노벨상이라는 최고의 영예로 이어졌다.
그러나 대한민국 기초과학은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노벨상 수상까지 평균 31.8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 연구 풍토는 여전히 '빨리빨리'라는 단기 성과주의에 갇혀 있다. 짧은 연구 지원 기간은 창의적이고 근본적인 연구를 질식시키고, 오직 가시적인 실적 쌓기에만 급급하게 만든다. 노벨 과학상 수상의 씨앗이 될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는 연구의 토양을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국책 과제가 단기적 목표 달성 중심으로 설정되고, 그 과정에서 연구자들은 행정 부담에 시달리며 정작 중요한 연구에는 몰두하기 어려운 악순환이 반복된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국가의 미래를 좀먹는 '의대 쏠림' 현상이다. 2023년 입시에서 서울대학교, 한국과학기술원(KAIST), 포스텍(POSTECH) 등 국내 최상위권 이공계 대학 정시 합격생 중 28.8퍼센트(%)인 1천343명이 등록을 포기하고 의학 계열로 진학했다는 충격적인 통계는 우리 기초과학의 암울한 미래를 여실히 보여준다. 학령인구 감소로 지방대 자연과학 학과가 먼저 사라지는 상황에서,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우수 인재들이 기초과학 분야의 난제 도전 대신 '고소득 전문직'만을 좇게 만드는 현실은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치명적인 독소다.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의사가 되기 위해 기초과학을 등지는 현상을 방치한다면, 노벨상은커녕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경쟁력 자체가 뿌리부터 흔들릴 것이다.
게다가 경직된 연구 환경도 문제다. 노벨상 수상자 중 상당수가 70대 현역 연구자로 활발하게 활동하지만, 한국은 65세라는 이른 정년 제도가 연구의 연속성을 가로막고 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경우 정년이 만 61세로 더욱 짧다. 숙련된 연구자들이 충분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위대한 연구를 이어나갈 기회를 박탈하고, 중도에 이탈하게 만드는 이러한 시스템은 기초과학 발전의 발목을 잡는다. 연구자들이 안정적인 삶과 연구 몰입 환경을 제공받지 못한다면,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자유대한민국은 이제 물질적 풍요를 넘어 인류의 지적 성장에 기여하는 진정한 선진 강국으로 도약해야 한다. 그 길은 튼튼한 기초과학의 뿌리 위에서만 가능하다. 더 이상 눈앞의 단기 성과에만 집착하고, 우수 인재들의 '의대 쏠림' 현상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정치권과 정부는 이제 단기적인 포퓰리즘(populism) 정책이나 보여주기식 '정책 쇼'를 멈춰야 한다. 대한민국의 기초과학 부흥을 위한 장기적이고 일관된 비전을 제시하고, 우수 인재들이 의대가 아닌 과학자의 길을 택할 수 있도록 파격적인 연구 투자와 합당한 예우를 보장해야 한다. 과학자를 존경하고 그들의 헌신에 감사하는 사회적 풍토 조성은 물론, 고질적인 단기 성과주의에서 벗어나 연구의 자율성과 연속성을 보장해야 한다. 긴 호흡으로 인내하며 기초과학의 뿌리를 튼튼히 내릴 때 비로소 자유대한민국은 노벨 과학상을 통해 인류에 기여하고, 진정한 의미의 선진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벨상 수상은 영원히 허황된 '환상'으로만 남을 것임을 정치권과 국민 모두는 직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