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경성산부인과병원장이던 구도 다케조 소장 퇴계 초상.사진="일제강점기 경성부인과병원장 구도 다케조 소장 초상화"(영남대 최재목 철학과 교수)/매일경제 캡처
1월 13일은 조선 시대 대유학자 퇴계 이황(李滉) 선생의 탄신일이다.
1502년 1월 13일에 태어나 1571년 1월 13일 서거한 퇴계 선생은 연산군 재위 3년째부터 중종, 인종, 명종을 거쳐 선조 3년까지 격동의 시대를 사셨다.
1537년에 태어나 1587년에 서거한 율곡 이이(李珥)보다 35년 선배인 셈이다.
참으로 퇴계 이황의 생애는 파란만장했으며, 시대적 세월 또한 험난했다.
율곡 이이와 더불어 퇴계 이황 또한 임진왜란 발발 21년 전 서거하셨으나, 장차 왜란이 일어날 것을 충분히 예측하는 혜안을 지니셨을 것으로 필자는 추측한다.
퇴계 이황의 사상은 이(理)와 기(氣)를 구분하는 주리적 이기이원론을 바탕으로 한다.
사단칠정론을 통해 인간 본성을 탐구하고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통한 실천적 수양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즉, 이기이원론에 입각한 성리학자이다.
필자는 퇴계의 실천 중시 사상을 중심으로, 퇴계의 '낮퇴계 밤토끼' 소문을 깊이 파헤쳐 보고자 한다.
◆ 험난한 생애와 권씨 부인 일화로 드러난 인간미
퇴계는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 이식 진사(진보 이씨 또는 진성 이씨)가 40세로 사망하여 어머니 춘천 박씨 슬하에서 성장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혼인했으나, 이황이 27세 때 둘째 아들을 낳고 허씨 부인이 사망하는 불운을 겪었다.
30세에 둘째 부인 권씨와 혼인했으나, 권씨의 가정사 역시 정치적 격변기에 크게 희생당한 삶이었다.
권씨의 할아버지 권주(權柱)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갑자사화 때 교살당했고, 할머니는 관비가 되고 부친은 유배를 당했다.
이 과정 속에서 어린 나이에 사화의 참혹함을 경험한 권씨 부인은 정신적 후유증으로 이상 증세를 보였다.
부친 권질은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묘사화 후 다시 무고로 인한 옥사로 예안 땅에 유배되어 있었다.
평소 퇴계의 사람됨을 눈여겨본 권질은 퇴계를 불러 자신의 딸을 의탁했다.
딸이 어려서 겪은 집안의 모진 일로 정신이 혼미하여 아무도 색시로 데려가지 않는다고 간청했고, 퇴계는 심사숙고 끝에 혼인을 승낙했다.
이 권씨와의 혼인 생활 중 숱한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일가친척들이 퇴계의 종가에 모였을 때였다.
권씨 부인이 느닷없이 차려진 제사상의 음식을 집어먹으며 상위에서 떨어지는 배를 치마 속에 숨겼다.
이 광경을 목격한 친척들이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자, 퇴계의 형수가 질책했다.
이에 퇴계는 태연하게 "제사도 지내기 전에 며느리가 음복하는 것은 예절에 벗어난 일이지만, 조상께서는 철부지를 귀엽게 여기실망정 손자며느리의 행동에 노여워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형수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필자가 잘 가르치겠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며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부인을 따뜻하게 감쌌다.
퇴계의 이 말에 동서를 꾸짖던 큰형수도 미소를 지으며 "동서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야. 서방님같이 좋은 분을 만났으니"라고 했다고 한다.
제사를 끝낸 후 아내에게 왜 그랬냐고 묻자 배가 몹시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답했고, 퇴계는 권씨 부인을 위해 배를 손수 깎아 주었다고 전해진다.
또 한번은 이황이 상가집에 가기 위해 흰색 도포를 입으려 했는데, 도포가 해져 있었다.
권씨 부인에게 기워 달라고 부탁했더니 붉은 천을 덧대어 기웠다.
이황은 아무 말 없이 그 도포를 입고 상가집으로 향했다.
예법에 정통한 퇴계가 상가집에 빨간색 천을 덧대 기운 흰 도포를 입고 온 것을 본 사람들은 상당히 놀랐고, 빨간 천을 덧대는 것이 예법에 있냐고 묻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에 이황은 "붉은색은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것이라네. 우리 부인이 좋은 일이 생기라고 일부러 붉은색으로 기워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라고 답했다.
이처럼 권씨 부인의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끝까지 그녀를 아끼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은 짓궂게 권씨 부인에게 퇴계의 '밤일은 어떻소'라고 물었고, 권씨 부인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대며 웃으며 "낮퇴계지 밤퇴계는 아니고 밤토끼올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퇴계가 낮에는 양기가 성하여 고고한 기품을 지키는 것이 선비의 도리지만, 음기가 강한 밤에는 토끼처럼 방사(房事)를 격하게 함이 옳다는 지론을 실천한 것이라는 해석을 낳는다.

이항복 호성공신상 후모본(왼쪽)과 호성공신 교서
백사가 1604년 책봉된 호성공신(扈聖功臣)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로, 세 등급으로 나뉜다. 당시 1등 공신으로 분류된 인물은 이항복과 정곤수, 단 두 명이었다. 이항복이 받은 호성공신 교서에는 "충성스럽고 건실하게 나(선조)를 잘 호위하며 엎어지며 달아나느라 온갖 고생을 고루 맛봤다. 시종 어려움과 험난함을 겪은 것이 어느 누가 경의 어질고 수고한 것을 넘을 수 있겠는가"라며 "대사마(大司馬·병조판서)에 발탁돼 홀로 수년간이나 그 책임을 맡아 사람들이 든든히 믿고 마음을 차츰 떨치게 하여 조정에서도 그에 의지하며 소중히 여겼다"고 기록됐다. 교서는 공신 이름과 업적, 특권, 명단을 적은 문서다. 이항복 호성공신 교서는 가로 271㎝·세로 37㎝이며, 명필로 알려진 한호가 글씨를 썼다. 마지막 부분에는 발급 날짜가 있고,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 도장이 찍혔다. 이항복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로서 왕비를 개성까지 호위했고, 왕자는 평양으로 호종했다. 이에 1613년에는 임진왜란 때 광해군 호종에 공을 세운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 임해군 역모 처리와 관련해 익사공신(翼社功臣) 2등, 김진재 옥사 처리에 기여한 형난공신(亨難功臣) 2등에 각각 임명됐다. 그에 앞서 1590년에는 정여립의 난을 처리했다는 이유로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올라 모두 5차례 공신이 됐다. 또한 호성공신과 위성공신이 됐을 때 받은 초상화를 18세기에 베껴 그린 후모본(後模本)이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이항복 초상화에는 원본 특징이 남았으나, 얼굴과 복식에 명암을 넣은 점은 18세기 특색"이라며 "위성공신상 후모본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있는 '이항복 초상화 초본'과 얼굴 표현이 유사해 서울대 작품이 이항복 57세 때인 1613년 초상화 초본(밑그림)일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유물 기증에 기여한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두 초상화는 후모본이지만, 국난을 극복한 기개와 영웅적 면모가 잘 드러난 수작"이라고 평가했다.(글.사진=연합뉴스)
◆ 지혜와 포용으로 실천한 삶
또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번은 얼굴이 붉은 한 소년이 퇴계를 찾아와 절하고는, "어르신께서는 학문의 도가 깊으시어 모르시는 것이 없으리라 여겨져 필자가 평소 궁금히 여기던 것을 여쭙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퇴계가 말해보라 하니, 소년이 "여자의 음경은 어찌하여 보지라 하고 남자의 그것은 자지라 하나이까?"라고 물었다.
이에 퇴계는 태연히 대답하기를 "여자는 걸을 때 그것을 감추고 다니므로 보장지(步藏之)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이 발음하기 쉽도록 장(藏)자를 빼버리고 보지라 하고, 남자의 성기는 앉을 때 그것을 감추어야 한다고 하여 좌장지(坐藏之)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부르기 쉽도록 장(藏)자를 빼고 자지라 부르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소년이 이어서 "그러면 왜 남자의 그것을 좆이라 하고 여자의 것은 씹이라고 하나이까?"라고 당돌하게 묻자, 이번에도 퇴계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남자는 그것이 늘 말라 있으므로 조(燥)라고 하는데, 그것을 강하게 발음하여 좆이 되었고, 여자는 늘 그것이 습(濕)하므로 그것을 강하게 발음하여 씹이라 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그 소년이 기뻐하며 퇴계 선생께 깊이 절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그 소년은 훗날 백사 이항복이었다. 이 일화는 퇴계의 깊은 학식과 함께 세속의 질문에도 편견 없이 답하며 가르침을 주었던 실천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퇴계 선생은 며느리에 대한 사랑 또한 지극했다.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과부가 된 둘째 며느리 류씨가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집안을 돌아보던 이황은 며느리 방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에 방안을 살펴보게 되었다.
짚으로 만든 선비 인형 앞에 술상을 차려두고 이야기를 나누다 흐느껴 우는 며느리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던 이황은 한 지아비만 섬겨야 한다는 조선의 법을 어기고 며느리를 재혼시켜주고자 했다.
며느리 류씨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귀가가 늦어진다는 억지 트집을 잡아 내쫓았다.
쫓겨난 며느리 류씨는 친정으로 가는 도중 자결하려다, 친정아버지에게 건네라는 시아버지의 서찰이 생각나 읽어보게 되었다.
서찰에는 ‘이것을 전하면 친정에서 너를 재가 시켜 줄 것이다, 행복을 바란다’고 적혀 있었다.
몇 년 후, 이황은 임금의 부름을 받고 평양으로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저녁상과 아침상 모두 이황이 좋아하는 반찬으로 차려졌고, 이황은 그 집에 며느리가 살고 있음을 직감했다.
다음 날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나서는 이황에게 집주인은 한양 가는 길에 신으라며 잘 만들어진 버선 두 켤레를 건넸다.
이황은 며느리를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재가하여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며 길을 떠났다.
또한, 맏며느리 봉화 금씨는 평소 시아버지의 은혜에 감동하여 죽어서라도 시아버지를 따르겠다는 효심을 담아 시아버지 묘소 아래에 묘자리를 잡고 있다.
이처럼 퇴계 이황 선생은 험난한 시대에도 불구하고 고고한 학문적 깊이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뜻한 정을 지녔던 분이다.
그의 삶과 일화들은 단순히 옛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위대한 가르침과 함께 진정한 인간미가 무엇인지 되새기게 한다.
퇴계 선생의 삶이 어려울 때 더욱 그리워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 본 기자 단상은 필자의 의견이며, 본지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