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세한도' 국립중앙박물관 품으로
지난 2020년 8월20일 국립중앙박물관은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 씨가 지난 1월 말 박물관 측에 전화해 추사 김정희의 최고 걸작인 국보 제180호 '세한도' 기증 의사를 전달해왔다"고 밝혔다. 세한도(歲寒圖)는 1844년 59세의 추사가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으로, 자신이 처한 물리적, 정신적 고통과 메마름을 먹과 거친 필선을 이용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사진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사진=연합뉴스
철장석심이란 굳센 의지나 지조가 있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로 일편단심을 나타내고 있다.
하다 못해 말 못하는 짐승도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 판국에 시시비비를 떠나 소위 조직의 리더라고 자처했던 자들의 조변석개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며 측은함을 넘어 처참해지는 작금의 시국에서 조선시대 세조를 향해 ‘나으리’라 불렀던 만고의 충신 성삼문과 낙락장송이 떠올라 몇 자 적어 본다.
◆ 낙락장송의 상징성과 성삼문의 절의
북풍한설에도 끄떡없는 낙락장송 소나무는 늘 푸른 모습을 띠는 것에서 굳은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사람의 됨됨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한민족은 소나무를 무척이나 좋아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고,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낙락장송의 ‘절의가’를 읆었다.
또한 나무 중 단연 으뜸으로 흔히 송수 천년(松壽千年), 송백 불로(松栢不老) 장수의 상징으로 불리며, 두 개의 잎은 낙엽이 되어 떨어질 때도 서로 하나가 되어 부부애의 상징으로 비유되곤 한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생을 마감한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 출신으로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실로 다양한데도, 사육신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충신과 지사로만 평가받는 경우가 많지만 세종이 정음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부터 참여하여 한글문화 창달에 크게 공헌했다.
◆ 세조 앞에서도 굽히지 않은 충의
이처럼 성삼문은 단종 복위에 앞장섰으나 발각돼 38세를 마지막으로 처형되었는데, 거사 실패로 잡혀 고문을 받을 때 거취를 분명히 하라며 세조가 묻는다.
그러자 성삼문은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
라고 답해 버린다.
세조는 죽기를 각오한 성삼문의 의지를 알게 됐고 세조가 직접 심문할 때도 끝내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불렀다.
세조가 다시 묻는다.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그럼 내가 준 녹봉(급여)은 왜 먹었느냐?”
그러자 성삼문은 “상왕(단종)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나으리의 신하인가? 당신이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해 보라”고 한다.
세조가 명하여 집을 수색하니 즉위 첫 날부터 받은 녹봉에 어느 날 받은 녹이라고 표시를 해 전부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고 한다.
이런 태도에 화가 난 세조는 쇠를 불에 달궈 담금질로 성삼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지졌으나,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라” 추상같이 말했다.
국문을 마치고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가면서도 성삼문은 한 수의 시를 읊는다.
“북소리 둥둥
이 목숨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네.
저승으로 가는 길엔
주막도 없다는데
이 밤은 어느 집에서
쉬어 갈 수 있으리오?”
돌아보니 어린 딸이 울면서 따라왔다.
이에 성삼문은 “사내 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살겠구나” 하면서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성삼문 표준영정(손연칠, 1998), 170×104cm.사진=국립현대미술관
◆ 혼돈의 시대에 그리운 절개의 덕목
비록 죄인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언정 끝까지 지켰던 지조와 절개는 작금의 대혼돈의 시대에 이합집산을 넘어 한낱 금수만도 못한 위정자들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 아닐는지...과연 어디다 울분을 토해내야 할지 개탄스럽기만 하다.
세상천지 부끄러운 망국의 시대, 성삼문의 지조와 절개를 닮은 정치 지도자가 한 없이 그리운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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