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 남북고위급회담 문서 공개
통일부는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여덟 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회담 문서를 2일 공개했다. 사진은 19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사진=통일부/연합뉴스

통일부는 2일,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8차례 열린 남북고위급회담 문서를 공개했다.

남북은 양측 총리가 수석대표로 나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으나, 북한은 “하나의 조선”을 강조하며 상호 체제 인정과 국호 사용을 “분열지향적”이라 비판했다.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후 손 맞잡은 정원식 전 총리와 연형묵 북한 정무원 총리.사진=연합뉴스


1991년 10월 24일 평양 제4차 고위급회담에서 연형묵은 “남측이 북남 관계를 국가 간 관계로 정식화해 분열을 고착화한다”고 비난했다.

안병수는 기자회견에서 합의서 국호 명기에 “두 개 조선 고착화”라며 반발했으나, 북한의 양보로 최초로 양측 국호가 명기됐다. 최우진은 서울·평양 상주대표부 설치 제안에 “국가 간 관계로 보인다”며 판문점 연락사무소로 대체했다.

통일부, 남북고위급회담 문서 공개
통일부는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여덟 차례에 걸친 남북고위급회담 문서를 2일 공개했다. 사진은 1991.12.13일 제3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남북 총리가 서명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원본.사진=연합뉴스


북한은 유엔 단일의석 가입을 주장하며 남측의 동시 가입안을 비판했고, 1992년 9월 백남순은 “북한에 핵시설이 없다”며 미국의 남측 핵기지를 문제 삼았다.

백남순은 이인모 송환을 요구하며 “노태우 대통령이 노력 중”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동복은 송환 불가를 강조했다.

이후 감사원은 노태우의 송환 승인 훈령이 안기부의 조작·지연으로 전달되지 않은 사실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