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6일 시집 '병사의 자서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고인.사진=연합뉴스

20여 년간 대북 라디오방송을 통해 북한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탈북 시인 김성민 전 자유북한방송 대표가 암 투병 끝에 향년 63세의 일기로 영면했다.

그는 생전 북한 정권의 강도 높은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의 희망을 전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12일 오후 1시5분께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폐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자유북한방송(대표 이시영)이 전했다.

고인은 지난 2017년 3월 뇌종양 진단을 받은 뒤 한때 병세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지난해 암이 전이되어 시한부 선고를 받았었다.

지난 1962년 자강도 희천시에서 서정시인 김순석(1922~1974)의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김형직사범대학교 어문학부(작가 양성반 3년제)를 졸업한 뒤 지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북한군 예술선전대 작가(대위)로 활동했다.

지난 1995년 탈북과 1996년 재탈북을 거쳐 지난 1999년 2월 대한민국에 입국하며 자유를 찾아왔다.


자유대한민국에 정착한 고인은 한국방송(KBS)의 대북 방송인 '사회교육방송'에서 근무했으나, 지난 2003년 노무현 정부 당시 대북 방송이 전면 중단되자 퇴사했다.

이후 지난 2005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지난 2007년 4월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하며 시인으로서의 삶도 개척했다.

그는 지난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백두한라회장,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을, 2005년부터 2006년까지 회장(제4대)을 역임하며 탈북민 활동가들의 맏형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인의 가장 큰 족적은 지난 2004년 4월 대북 인터넷방송으로 시작한 자유북한방송을 설립하고 대표로 활동한 점이다.

처음에는 인터넷방송으로 시작했으나, 지난 2005년 12월 대북 단파방송으로 전환하며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

기자 여섯 명과 엔지니어 한 명으로 구성된 이 방송국은 하루 두 차례(오전 2시부터 30분간, 오후 7시부터 30분간) 황장엽(1923~2010)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강좌와 탈북자들의 수기 등을 방송했다.

고인이 제작한 프로그램은 수잰 숄티 디펜스포럼 대표가 이끄는 미국자유북한방송에 보내져, 미국에서 영국 업체를 통해 전 세계로 단파가 송출되는 방식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북한의 대남 기구인 반제민전(구 한민전)이 방송 중단을 요구하며 폭파 위협까지 가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일 만큼 그 파급력이 엄청났다.

고인은 지난 2006년 6월과 2013년 10월에도 협박성 소포와 편지, 전자우편(이메일) 등을 받으며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2005년 미국 하원에서 북한을 규탄하는 기습시위를 벌이는 고인.사진=연합뉴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수잰 숄티 대표와 함께 매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북한자유주간' 행사를 공동으로 개최했으며, 미 의회 청문회와 토론회, 다양한 북한인권행사에 참여해 북한 주민들의 참혹한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헌신했다.

이러한 노력은 미국을 시작으로 세계 여러 나라가 잇따라 북한인권법을 제정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고인은 지난 2023년 3월 통일부 북한인권증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며 북한 인권 개선에 기여했다.

자전적 시집 '병사의 자서전'을 지난 6월 펴낸 시인이기도 한 김성민 전 대표는 시를 통해 고향 북한과 정착지 대한민국에 대한 깊은 사유를 남겼다.

그는 시 '쌀에 대하여'에서 “미궁 같은 가마 속에선/한 되의 보리쌀이 버무려진다./누이의 정조와 맞바꾼 쌀이다/자식을 굶겨 죽인 아비면 어떠냐/매운 눈을 비벼가며 저녁연기를 피워 올려라./쌀을 살리자는 사람들이 있다/죽어가는 모든 것 위에 유독/쌀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북한의 비극적인 현실을 노래했다.

대한민국을 “산에 나무가 있는 게 신기”하고 “수도꼭지를 틀면 찬물 더운물이 콸콸 나오고, 버튼만 누르면 구들이 뜨뜻해지는 게 또한 신기”한 곳이자, “없거나, 하나뿐이어서 귀하고 소중했던 것들이 차고 넘치는 나라”이며, “우리 집 창문이 몇 개인지를 세다가 왈칵 눈물을 쏟은 적도” 있는 곳(시 '신세계')이라 찬탄했다.

그러나 동시에 대한민국을 “한번 걸어 잠그면 열리질 않”고 “이웃들의 얼굴조차 모르고 살”며 “옆집에서 고성이 터져도 상관없는 일이라 외면하는” 곳(시 '문')으로 묘사하며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시 '아웃사이더'에서 “이 땅에서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게 급선무란 생각이 드는가 하면, ‘남조선 사회’가 탈북자인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다시 심란해진다”고 탈북민으로서 겪는 내면의 갈등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 '어느 탈북자의 기도'에서 "굶어 죽은 자식 앞에서/흘리던 눈물을 채 닦아내기도 전에/사회주의 승리를 위한 전투가 강요되고/맹목적인 충성경쟁을 벌여야만 했던/암흑의 땅, 그런 북한에 비해 대한민국이/덜 살기 좋은 나라라고 우겨대는 그런 사람들 없도록 해 주소서.”라고 자유 대한민국에 대한 굳건한 신념을 보여주었다.

또한 '자유'라는 제목의 시에서는 “그것 없이는 살아도 죽은 목숨인 / 숨결이며 가치인 자유는 / 고향으로 안고 갈 우리의 맹세”라고 노래하며 북한 주민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대변했다.

주요 저서로는 공저 '북한에서 온 내 친구'(2002년, 우리교육), '10년 후 북한'(2006년, 인간사랑)이 있으며, 시집 '고향의 노래는 늘 슬픈가'(2004년, 다시)를 펴냈다.

그는 프랑스 국경없는기자회 '올해의 매체상'(2008년), 대만 민주주의기금 '아시아 민주인권상'(2009년), 한반도인권과통일을위한변호사모임 '북한인권상'(2019년), 국민훈장 동백장(2024년)을 수상했다.

북한이탈주민으로서 탈북민 정착 지원 공로로 훈장을 받은 것은 고인이 처음이다.

지난 1995년 문명옥 씨와 결혼하여 딸 김예림 씨를 두었으며, 빈소는 이화여자대학교 서울병원 특1호실에 마련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