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론계에서 '칼럼니스트'(columnist)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며 직업화한 인물로 꼽히는 수탑 심연섭(須塔 沈演燮, 1923~1977)이 재조명되고 있다.
공식 기록은 없으나 언론계에서는 수탑 심연섭을 제1호 프로 칼럼니스트로 평가하며, 그의 언론인으로서의 삶과 글쓰기 정신이 현 시대 언론인들에게도 깊은 의미를 던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칼럼은 일반 기사와 달리 필자의 주관적 견해와 통찰을 담는 글이며, 언론사 내부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오랜 경험과 통찰력을 쌓은 시니어 기자들이 칼럼니스트 역할을 수행한다.
수탑 심연섭은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탄생한 연합통신의 전신 격인 동양통신과 합동통신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그의 최종 직함은 동양통신 이사였다.
언론계 원로들에 따르면 수탑이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이름 뒤에 붙여 쓴 것은 동양통신 조사부장으로 일하던 1960년대에 다른 신문사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타사 지면에 자신의 회사명과 직명을 쓰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여겨 선택한 결과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유려한 글솜씨와 날카로운 감각으로 필명을 날렸으며, 여러 주요 일간지와 주간지에서 수탑의 칼럼을 고정 연재할 정도로 그의 글은 많은 인기를 얻었다.
당시 연합뉴스(YNA, Yonhap News Agency), 에이피(AP, Associated Press), 교도통신 같은 통신사는 논평 기능 대신 사실 위주의 스트레이트 뉴스(straight news) 공급에 주력했으며, 통신사 기자들은 '이름 없는 기자'로 불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색을 중시하는 신문사들이 오피니언 지면의 고정란에 그의 칼럼을 바이라인(byline)과 함께 실어준 것은 당시 수탑의 언론계 내 위상을 대변한다.
수탑은 언론계 초년병 시절부터 유머가 넘치고 글을 재미있게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칼럼은 심각한 시사 논평보다는 문화적 단상과 생활 속 소재를 세련된 문체로 풀어내는 문필가의 풍모가 묻어났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에 유머와 해학까지 가미한 그의 '낭만 치사량' 칼럼은 많은 독자를 확보했으며, 이는 한국 저널리즘에서 칼럼의 품격과 위상을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연재물을 모아 칼럼집과 수필집도 펴냈다.
칼럼니스트로서 이름을 날렸을 뿐만 아니라, 수탑은 취재 현장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기자였다.
6.25 한국전쟁 기간 드와이트 디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방한했을 당시, 그는 한국 기자 중 유일하게 수행취재단에 포함되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유일한 언론인으로서 수행단에 참여했으며, 유엔총회 한국 대표를 두 차례나 지내기도 했다.
명예 외에 부와 권력도 쌓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부에서도 그에게 요직을 제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는 글쓰기와 풍류 외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수탑 심연섭은 술을 좋아해서 ‘주선’(酒仙)으로 불릴 만큼 풍류와 멋을 즐겼으나, 50대 중반에 암으로 작고했을 당시 남긴 것은 초라한 전셋집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천생 글쟁이였던 그의 타계 소식은 주요 외신들이 보도했으며,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삼부 요인이 조의를 표했다.
한국일보 전성기를 이끌었던 '신문 거인' 장기영이 조사(弔詞)를 바쳤는데, "술이부작(述而不作)은 당신의 성품이었소"라는 대목은 고인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담고 있다.
술이부작은 논어에 나오는 말로 ‘그대로 기술하되 지어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칼럼니스트이자 기자로서 수탑이 얼마나 치열하게 객관적으로 글을 썼는지를 칭송하는 표현으로 해석된다.
그의 생전 강조했던 사실 보도의 중요성은 현재 언론인들에게도 객관적이고 공정한 글쓰기의 무게감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