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 학생의거의 주요인물(左)과 이를 보도한 1945년 12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右). 학생의거에서 피살당한 신의주제일공업학교 4학년 박태근 학생의 모친이 아들의 유골을 안고 서울로 왔다는 내용이다.
일제식민지에서 해방된지 3개월이 갓 지난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 6개 남녀중학교 학생 3천 500여명은소련공산당을 앞세운 김일성 전체주의에 맞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당시 시위의 맨 선두에 섰던 제1공업학교의 박태근을 비롯한 각 학교에서 24명이 목숨을 잃었고 제1공업학교의 선우은명을 비롯한 350여 명이이 중 경상을 입었으며 1천여 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제 2공업학교의 황신하를 비롯한 200여명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형(流刑)되어 처형되거나 또는 유형(流刑)되었다. 북한공산당은 이 의거(義擧)가 종식된 후에도 주동 학생을 색출하기 위해 수많은 학생들을 보안대로 강제로 끌고 가서 갖은 고문과 박해를 가했다.사진=리버티코리아포스트 캡처
신의주 학생의거 80주년, 우리 선배 세대가 피로써 외쳤던 진실을 다시 되돌아보아야 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감동은 길지 않았다.
동유럽에서 공산정권을 줄줄이 세우며 위성국을 만든 소련은 동북아에서도 동일한 공작을 펼쳤다.
중국 공산당이 서안까지 밀려 패주하던 시기, 스탈린은 중공군에게 군수품과 자금을 지원했으며,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해방 직후 한반도 북부지역에 가장 빠르게 진입했다.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에서도 친소정권을 세우기 위해, 1945년10월 북한에 이북5도 임시 인민위원회를 조직했고, 소련군 대좌였던 김일성을 대리인으로 세웠다.
이처럼 해방정국에 등장한 김일성의 정통성은 북녘동포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소련군의 총구와 스탈린의 지령에서 나왔다.
친일청산의 명분과 인민이라는 이름을 앞세웠으나, 소련군정은 김일성을 이용해 소련식 공산독재를 구축하기 위한 사전포석을 시작한 것이다.
토지몰수, 종교탄압, 사상검열, 반소 인사 숙청을 밀어붙였고, 소련군과 김일성의 인민위원회는, 점령군처럼 공포를 앞세운 지배자가 되어 민가 약탈, 여성에 대한 겁탈과 폭력 등을 저질렀다.
인민이라는 이름의 권력은 사실상 전체주의를 구축하기 위한 폭력장치였으며, 이념 세뇌에 항거하는 주민들의 숨통을 틀어막기 시작했던 것이다.
학교 역시, 학생들을 조선의 미래를 이끌어야 할 지식인으로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김일성 교시에 복종해야 하는 혁명인력으로 취급했으며, 이런 억압 속에서 학생들은 김일성의 강압통치에 가장 먼저 저항했다.
서울 장충동 자유총연맹 경내에 세워진 신의주 반공의거 기념탑.사진=펜앤마이크 캡처
◆ 전체주의와 자유의 갈림길에서 터진 한민족 최초의 조직적 저항
신의주 학생의거는 전체주의와 자유의 갈림길에서 한민족이 처음으로 보여준 집단적 저항이었다.
독재가 강화되는 잔혹한 현실속에서 가장 먼저 분노한 것은 신의주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으며, 그는 인민위원회 집회에서 소련군의 겁탈과 약탈을 비난하며 항의했고, 소련군은 젊은 학생을 무참히 구타했다.
이는 한 세기 뒤까지 이어지는 북한 독재의 잔혹한 본질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었다.
이 폭행사건이 전해지면서 신의주지역 전체가 분노했고, 그 분노는 11월 23일 신의주 학생의거로 폭발했다.
신의주 학생의거는 이러한 폭정에 대한 한민족 최초의 조직적 저항이었던 것이다.
소련군의 폭력에 항의하면서, 김일성 괴뢰권력이 조선의 미래를 짓밟을 것을 알아차리고 일어선 것이다.
학생들은 학습권,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요구했지만, 소련군정과 김일성은 시위 학생과 시민들에게, 대화 대신 실탄을 난사해 24명의 학생들이 숨졌고, 수백 명의 학생들이 체포, 구금되었다.
학생들을 향해 총을 쏘는 정권이 어찌 인민정부가 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거짓과 폭력은 시작부터 소련군이 심어놓은 공포정권의 출발이었으며, 훗날 북한을 전체주의 감옥국가로 몰아넣는 예고였다.
이처럼 신의주에서 시작한 김일성의 살인적 광기는, 무력통일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수백만명의 한민족의 생명을 빼앗고 한반도를 폐허로 만든 6·25 전쟁의 참상을 만들었으며, 80년 동안 북녘땅을 공포정치의 시험장으로 만들었다.
반발주민지도자 탄압 및 숙청, 교회 파괴, 정적 공개처형 등등. 김일성의 폭정은 소련식 전체주의를 넘어, 세계 최악의 세습 독재를 만든 것이다.
신의주 학생의거, ‘반공학생의 날’로 제정
1956년 11월 24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신의주 학생의거사건 11주년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행사에서 이날을 반공학생의 날로 제정할 것을 결의하여, 1957년부터 반공학생의 날이 되었다.글.사진=국가기록원
◆ 80년이 지나도 끊이지 않는 김일성 왕조의 족쇄
신의주 학생의거는 이러한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광기와 폭력이 계속된다면, 한반도는 재앙을 맞을 것이다.”라는 학생들의 외침은 예언이었고, 그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80년이 흐른 지금도 북한은 김일성 왕조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서는 현대판 노예노동이 이어지고, 주민들은 통신과 이동, 표현의 자유를 전혀 갖지 못하고, 배급을 받기 위해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일상이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김일성의 폭정이 남긴 유산이며, 신의주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막으려 했던 바로 그 미래이다.
따라서 신의주 학생의거를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취급하는 것은 학생들의 숭고한 희생을 모욕하는 일이다.
신의주학생의거의 정신은 오늘도 북한 주민의 자유와 생존을 짓밟고 억압하는 김일성 독재체제의 본질을 폭로하는 살아있는 증언이 되고 있다.
북녘땅에서 이러한 비극의 악순환을 끝내기 위해서는 김씨 독재의 본질을 감추려는 모든 시도와 선전, 선동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북한동포를 억압하는 체제와 그 폭압적 행동을 묵인하거나 미화하면서, 그 범죄성을 흐리려는 모든 정치적 시도, 이념적 선전, 왜곡된 역사 서술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김씨 일가의 폭정을 외면하는 세력은 신의주 학생들의 승고한 희생을 모독하는 행태다.
80년 전 신의주학생들이 두려움 속에서도 외쳤던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절규는 아직도 실현되지 못했다.
신의주학생들의 용기는 지금 우리에게 자유의 가치를 지키라는 명령으로 남아 있다.
김일성의 살인적 광기가 만들어낸 그날의 비극을 기억하면서, 행동하는 민주시민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
신의주 학생의거 80주년, 우리는 스탈린의 총구가 만든 독재와 김일성의 광기를 미화하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신의주의 학생들이 열망했던 북녘동포들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반드시 되찾아 주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체제수호 애국국민들은 친중매국노, 친북주사파 등 반국가매국세력이 설치는 무능과 배신의 탐욕카르텔 정권을 끝장내고, 역사의 심판을 시작할 때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