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내부.사진=연합뉴스


■ “바보야, 문제는 여론·선거·사법의 조작이야.”

정치 평론가와 방송 패널, 그리고 여야를 막론한 정치 지도자들은 선거와 정치 현안을 평가할 때 대체로 하나의 공통된 오류에 빠진다.

과정은 지워버리고 결과만을 증거처럼 취급하는 태도다.

그러나 만약 경기 자체가 조작된 게임이라면 어떠한가. 공정하지 않은 룰 속에서 나온 ‘승리’에 대해 승자의 전략과 역량을 분석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 평가일 수 있을까.

필자는 오늘의 한국 정치가 더 이상 ‘공정한 게임’ 위에 서 있지 않다고 본다.

민주주의는 결과 이전에 과정이며, 과정이 무너진 결과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만큼 적절한 비유도 드물다.

자격을 갖춘 측량사 K, 혼란 속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거대한 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선 문지기들.

오늘의 한국 정치에도 자유민주주의라는 ‘성’의 문을 가로막는 세 유형의 문지기들이 존재한다.

■ 여론조사에만 기대는 첫 번째 문지기들

여론조사는 민심을 반영하는 도구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선거전이라면 첫 번째 문지기로 민심을 형성하고 유도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

선거 이전에 여론의 방향을 고정시키는 작업은 선거 조작 논란이 제기되는 국가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전조적 현상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최근 발표되는 일부 여론조사 결과들은 그 신뢰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낳고 있다.

예컨대 특정 지역에서 단기간 내 지지율이 수십 퍼센트포인트 급변하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면 이는 단순한 민심 변화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여론조사의 표본 구성, 조사 방식, 가중치 부여 과정에 대한 투명한 검증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여론조사는 민의를 반영하는 창이 아니라 국민을 설득하고 조종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특히 여론조사 표본의 기준이 현재 범죄집단인 중앙선거관리 당국과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될수록 여론조사 자체에 대한 불신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과 언론은 ‘추세’라는 이름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소비한다. 이는 국민을 기만하는 민주주의의 첫 단계일지도 모른다.

“야당이라면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공론화해야 한다.
여의도연구원은 독립적이고 투명한 방식의 자체 조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편향 의혹이 제기되는 여론조사에 대한 공개적 검증 요구는 정당한 정치 행위다.”

투표 (CG).사진=연합뉴스


■ 선거 통계 결과만 믿는 두 번째 문지기들

두 번째 문지기들은 선거가 끝난 뒤 등장한다.

이들은 결과를 전제로 승자의 모든 선택을 ‘탁월한 전략’으로 재해석한다.

그러나 통계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을 때 선전이 된다.

사전투표와 본투표 사이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비정상적 격차, 통계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수치들은 최소한의 문제 제기를 요구한다.

통계학은 확률의 학문이며 극단적 수치에는 설명 책임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 제기 자체를 ‘음모론’으로 봉쇄하는 순간 선거의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붕괴된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는 의심받지 않을 권리가 아니라 검증받아야 할 의무를 지닌다.

현장 수개표, 절차의 투명성 강화, 모든 의혹에 대한 공개적 검증은 선거 결과를 부정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를 정당화하는 장치다.

“대통령은 업무보고에서 왜 유독 선관위만 빼는가.
이를 회피하는 태도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더욱이 야당이 이 문제에 침묵한다면 그 침묵은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공범적 무기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법원.사진=연합뉴스


■ 사법 판단을 최종 진실로 포장하는 세 번째 문지기들

세 번째 문지기들은 헌법재판소와 사법부의 결정을 모든 논쟁의 종착지로 삼는다.

물론 사법 판단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사법 또한 인간의 제도이며 제도는 권력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선거관리 기구와 사법부 사이의 구조적 연계, 선거 관련 소송이 실질적 심리 없이 각하·기각되는 관행은 사법적 독립성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킨다.

선진 민주국가들이 강조하는 것은 철저한 "증거 기반 접근(Evidence-Based Approach)"이다.

충분한 증거 제시와 그에 대한 공개적 반박, 이 과정을 통과한 판단만이 사회적 합의를 얻는다.

이 기준에서 볼 때 일부 계엄과 탄핵 관련 중대 정치 사건에 대한 사법 결정이 정치적 판단으로 비치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법이 의혹을 해소하지 못할 때 판결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논쟁의 시작이 된다.

성을 지키는 자들, 혼동과 침묵의 마을, 그리고 성을 열지 못하는 사회. 이 세 부류는 모두 자유민주주의의 ‘게이트키퍼’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체제의 균열 위에 기생하는 문지기들이다.

카프카의 소설 속 마을 사람들처럼 우리는 거대한 관료주의와 권위 앞에서 질문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다.

증거를 가진 측량사 K가 있어도 성문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권력의 이동에 따라 철새처럼 움직이는 이들 역시 다르지 않다.

여론, 선거, 사법이 맞물려 게이트 키퍼로 작동할 때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은 의식으로 전락한다.

역사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조차 여론, 권력, 재판이 결합한 정치적 사건이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연말을 지나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과연 성문은 누구를 위해 닫혀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조작되고 무력한 마을 사람인가,
문지기인가, 아니면 성을 열기 위해 노력하는 측량사인가.

내년에는 여러 K가 뭉쳐 반드시 비밀스러운 성문이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민주주의는 침묵이 아니라 피터져라 두들기는 저항에서 살아남는다.

2025년 12월 30일 새벽에
호주 시드니에서

※ 본 칼럼은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로, 본지의 편집 방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