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프리덤타임즈"는 2022년 10월 1일에 창간했다. 인터넷 뉴스 창간 전에 시스템 작업을 완료하고, 비봉출판사에서 출간한 “우남 이승만 논설문집” 3권 중 제1권을 지난해 9월 20일부터 올해 9월 19일까지 당시 보도 날짜를 따라 그대로 전재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약 125년 전의 시대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독자들은 매일 혹은 며칠에 한 번씩 연재된 논설문집을 보면서 1권을 읽었다. 이제 창간 1주년을 맞아 “우남 이승만 논설문집” 제2권을 연재한다.
"우남 이승만 논설문집"에는 서재필이 조직한 학생청년회 ‘협성회’ 토론회를 이끈 이승만이 ‘협성회보’ 제작 편집을 맡았던 신문에서 수록한 것과 23세의 이승만이 '매일신문’을 창간 후 수록한 것 그리고 한성 감옥 복역 중(1899년~1904년)에 비밀리 집필하여 감옥 밖으로 보내 제국신문에 게재했던 수백 편의 논설 중 일부가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는 공화국이다. 공화국으로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현재의 시대 사람들에게는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으로 잘못된 인식과 나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는 상관이 없었다. 이미 그는 유일 후보로 최소 득표수를 너끈히 넘긴 당선자였다.
예나 지금이나 아랫사람 관리를 잘못하면 윗사람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지만, 이 나라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그 잣대가 너무도 가혹해 그의 훌륭한 업적은 논하는 것조차도 불편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고의 진리 중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론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절대 변하지 않은 진실과 바로 잡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러한 것들 중에서 다음의 내용은 제일 우선시 되어야 만이 이 땅에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언론의 정통성과 역사를 재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1898년 4월 9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이 창간한 날이다. 이 신문을 창간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다. 그는 무지한 국민을 하루빨리 계몽해서 '똑똑한 국민’으로 만들고 싶어서 신문을 창간한 것이다.
하지만,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1896년 4월 7일 창간해서 오늘날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서재필의 피는 한국인지 모르지만, 그는 미국인이다. 서대문형무소에 전시된 서재필에 관한 내용을 보면, 그는 이 땅에서 우리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당시 그는 철저히 미국인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최초의 일간 신문인 ‘매일신문’ 창간된 날짜에 맞춰 '신문의 날’을 바꿔야 한다. 특히 대한민국 국민인 '이승만’이 최초로 신문을 만들었다. 훗날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이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대한민국인 만든 신문 날짜에 맞춰 '신문의 날’로 정하자는 주장을 제기한다. 이는 대한민국 언론의 정통성과 역사를 재정립하는 데 중요한 단계가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새롭게 평가하고, 그의 업적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과제다.
대한제국 광무 6년(1902년) 3월25일 제국신문 제5권 제62호에 실린 논설.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청 공사의 조회)
일전에 청 공사 허태신(許台身) 씨가 우리 외부(外部)에 조회하고 청구하되, 대한 북계에 둔취한 병정들이 청국 군사를 잡아다가 월경하였다 하고 경년(經年)토록 가두어 두니, 해(該) 지방대에 훈칙하여 놓아 달라고 하였다더라.
이 사연을 들으니 나의 마음이 자연 감동하여 청인을 위하여 비창한 회포가 생기는도다. 대개 청국 관민이 대한에서 갑오년까지 행악(行惡)하던 것을 생각하여 보라.
남의 국태공(國太公)을 꾀어다가 수삼 년을 욕보이고, 각국 공사가 입궐 폐현(陛見)할 때에 궐문 밖에서 교자(轎子)를 내려 걸어 들어가되 청국 사신은 그대로 타고 앉아서 탑전에 즉입(卽入)하며, 청국 상민들은 대소 관민을 무론하고 구타 후욕(逅辱)하기를 기탄없이 하며, 그 외에 무리한 대접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었고, 오늘날 외국인의 한성 개시(開市)한 것이 당초에 청인으로 인연하여 된 것이라. 그때 만일 청인만 성중에 없었더라면 통상 조약에 한성 개시를 허락지 않았을 것인데, 청인이 그 사경(四境)과 경위(經緯)는 생각지 않고, 그때까지도 당당한 세력으로 세상에 당할 나라가 없는 줄로만 알고 거만 고칠 수 없은즉, 청인은 한성에서 장사하며 다른 외국인은 어찌 말라 하리요. 부득이 허락되어 지금 대한 정치에 큰 문제가 된지라.
그때 대한 신민들은 그 수치와 그 무리를 당하면서 분하고 부끄러운 생각은 일호도 없고, 도리어 범 같이 두려워하며 상전 같이 대접하더니, 불과 육칠년 동안에 형편이 이렇듯 변하여, 그 백성이 오늘날 대한 사람의 손에 잡혀와 경년토록 갇혔으되 호소할 곳이 없다가, 어찌하여 그 공사 허태신 씨가 불쌍한 사정을 말하며 놓아 보내기를 간청하니, 세상 일 변하는 것이 이렇듯 측량키 어려운지라. 완고한 양반네들, 지금 세상은 날마다 변하여 가는 것을 좀 알면 좋을 지로다.
저 청국 백성으로 말하면, 세계에 제일 큰 대국이오, 의관문물(衣冠文物)과 예악법도(禮樂法度)가 세상에 제일인 줄로 알고 오만자대(傲慢自大)함을 비할 데 없던 백성이, 오늘은 만국 만민의 종이 되어 의지도 없고 돌아볼 데도 없이 되어, 그 불쌍한 남녀노소들이 외국 군사의 밥이 되어 금극(金戟)이 충돌하는 곳에 무죄한 혈육이 중원 산천에 편만하므로, 충신열사의 자손들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유(類)가 되며, 성현의 묘예들은 강도의 당(當)이 되며, 예의지방(禮儀之邦) 신민들은 이족(異族)의 노예가 되니, 그 사정을 생각하면 영웅의 강개한 눈물이 사람의 옷깃을 적실지라.
저 어리석은 백성들은 모두 운수로 돌려보내고 고칠 도리를 생각지 못하거니와, 실상을 상고하면, 첫째, 저희가 저희 직책을 못함이오, 둘째 윗사람들을 잘못 만난 연고라. 만일 저희들이 남의 나라 백성 같이 영광스러운 피를 흘려가며 그 정부 압제를 면하고 외국의 수치를 막아 영원무궁한 태평 기초를 닦아 놓았으면, 세상에 제일 많은 인종과 가장 부강한 강토를 가지고 어찌 저렇듯 되었을 리가 있으며, 그 관원된 이들이 백성을 참 나라 근본으로 대접하여 교육으로 북돋우며 법률로 김매어 그 뿌리를 든든히 박아 주었더라면, 나라와 백성도 저 모양 아니 되고, 자기네 영화 부귀도 영원히 끝나지 않았을 것을, 당장 이(利)만 생각하여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은즉, 서양 속담에 이른바 날마다 금알 낳는 거위를 급히 쓰기 위하여 배를 가름과 같은지라. 그런즉 상하가 다 자기의 잘못함으로 저 지경을 당함이니, 수원숙우(誰怨孰尤: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랴) 하리오. 실상 불쌍한 것도 없다 하리로다.
그러나 동양 사기가 시작된 이후로 대한과 청국은 관계도 별로 긴중하거니와 정의가 항상 자별(自別)하여 심상한 외국과 같지 않은 중, 겸하여 지금 형편인즉 동양이 만만위급(萬萬危急) 하므로 각국의 눈이 모두 이 두 나라에 있은즉, 지금이라도 이 두 나라가 손을 잡고 서로 권면하여 가며 수단 있게 조처하고, 부지런히 일을 하여 능히 따로 설만치 될 것 같으면, 각국이 다 주의를 변하여 모두 좋은 친구가 되고 동양이 태평부강 하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필경 불구에 이 두 나라로 인연하여 동서양에 풍진을 일으켜 놓고 그 중간에서 성명이 없어지고 말지라. 그런즉 이 두 나라가 지금 동서양 안위에 기계고등(奇計孤燈)이 된지라 좋으나 언짢으나 두 나라 교제는 특별히 친근하여야 될지라. 피차간 관민 물론이고 서로 형제같이 대접하기를 원하노라.
청 공사 조회 중에, 그 군사들이 월경하였다 하고 잡아 가두었다 하였으니, 이는 우리 생각에 좀 모호한 듯한지라. 당초 관병 같으면 그곳에서 어찌 하다 잡혔으며, 또한 대한 병참소(兵站所)에서 무슨 까닭으로 잡아다가 가두었으리요, 필경 무슨 사연은 있는 것이라. 작년에 그 지방 청인들이 종종 소동(騷動)하여 대한 지방에 침범도 하므로, 몇 백 명씩 작당하여 노략질도 무수히 하므로 변방 민심이 대단히 소요하여 우리 정부에서 관병을 파송하기까지 이르렀은즉, 대한에 손해도 적지 않았거니와, 만일 이 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타국이 기회를 얻어 간예할 염려가 없지 않은지라.
허 공사가 마땅히 이 사연을 그 정부에 보고하여 별반 방책을 마련하여 그 지방 난민을 진압하여야 내 권리 보호하는 도리에도 타당하거니와, 해(害)가 이웃에 미치지 않을 것이니, 십분 주의하여 양국의 정의가 돈목(敦睦)하여 지방이 편안하기를 기약하노라.
(다음 호는 1월8일 제5권 제64호)
<편집자 주>
비봉출판사 박기봉 대표는 "우남 이승만 논설문집"의 편집자다. 1970년에 서울상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1980년에 비봉출판사를 설립했다. 그는 1994년에 대한출판문화협회 상무이사를 역임했고, 1966년에 한국출판협동조합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및 역서로는 맹자, 충무공 이순신(4권),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신채호), 삼국연의(8권), 독립정신(이승만), 우남 이승만 한시집(일명 체역집) 등이 있다.
박기봉 대표의 열정적인 협조 덕분에 독자들은 당시 시대상과 함께 젊은 이승만의 사고와 사상을 엿볼 수 있게 됐다. 이에 대해 큰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연재 중에 어떤 독자는 "이렇게 훌륭한 글들이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 단 한 점도 실리지 않았다는 것은 국어학자들의 기만이고 역사학자들의 배임이다"라고 말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과 '우남 이승만 논설문집’이 대한민국 교과서에 실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우남 이승만 논설문집” 제2권을 연재한다.
이번 연재는 지난 1권처럼 당시 보도된 날짜가 아닌 월, 수, 금요일 순으로 하여 1주일에 3번 전재한다.
사진=더프리덤타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