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왼쪽)과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사진=연합뉴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당시 윤석열 전 대통령으로부터 "'싹 다 잡아들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이 1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이른바 '홍장원 메모'의 내용을 둘러싼 치열한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홍장원 전 1차장이 법정에서 대면한 것은 지난 2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이후 9개월 만이다.
홍장원 전 1차장은 1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박정호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우두머리 및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여 증언했다.
이날 재판에서는 탄핵 심판 당시에도 신빙성을 두고 공방이 벌어졌던 이른바 '홍장원 메모'가 핵심 쟁점으로 부상했다.
증인 출석한 홍장원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이 1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우두머리·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혐의 사건의 속행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발언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홍장원 전 1차장에 따르면, 계엄 당일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과 통화하며 작성된 1차 자필 메모를 시작으로, 보좌관이 정서(正書)한 2차 메모, 계엄 다음 날 보좌관이 기억에 의존해 작성한 3차 메모, 그리고 홍장원 전 1차장이 가필(加筆)한 4차 메모까지 여러 버전의 메모가 존재한다.
1차와 2차 메모는 폐기되었으며, 내란 특별검사팀은 이날 법정에 4차 메모를 증거로 채택해달라고 제출했다.
법정에서 공개된 4차 메모에는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 김민석, 딴지일보, 김어준, 조국, 박찬대, 정청래, 헌법재판관, 대법관, 선관위원장, 김명수, 김민우, 권순일 등 정치인 및 법조계 인물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홍장원 전 1차장은 지난해 12월 6일 4차 메모를 더불어민주당 박선원 의원에게 보냈다고 증언했으며, 이후 수사기관 조사 과정에서 홍장원 전 1차장이 체포 인원이 16명이 아니라는 의미로 삭선(削線)을 긋고 14명에 동그라미를 치는 등 추가로 가필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 측은 "메모 중에 증인이 작성한 부분이 별로 없고, 나머지는 보좌관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 부분은 진정성립을 따로 확인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메모의 진정성립(조서 등의 내용이 본인의 진술대로 작성됐다는 의미) 여부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재판부는 "문서를 작성할 때 초안을 지시하고 확인했다가 빠진 게 있으면 가필했다면 본인 작성으로 봐야 하지 않느냐"고 질의했다.
그러자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서 “(홍장원 전 1차장 메모의) 초고란 게 보면 지렁이 글씨”라며 “아라비아(숫자)가 지렁이처럼 돼 있어서 대학생들이 티셔츠도 만들어서 입는 정도였다”고 메모의 신빙성을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이어 "그것으로 보좌관을 시켜서 이런 것을 만들었다고 하니…초고란 것 자체가 이후 다른 메모들과 비슷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특검팀은 "재판장 말처럼 이 부분은 보좌관의 대필에 불과하지만, 사후적으로 증인이 내용을 확인하고 가필까지 해서 완성되었으므로 증인을 작성자로 보기에 타당하다"고 반박했다.
홍장원 전 1차장은 메모 작성 경위에 대해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 후 보안폰으로 전화를 걸어와 '비상계엄 방송을 봤냐'고 물어본 것 같았고, 봤다고 하자 '싹 다 잡아들여서 이번에 싹 다 정리해라'라는 말씀과 '대공수사권을 지원해주겠다'고 했다"며 "'방첩사를 지원하라'고 했는데, 단순하게 방첩사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원이나 예산을 무조건 지원하라고 강하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고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이후 여인형 전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 전화를 받았는데 너희를 지원해주라'고 했다"고 전했으며, 여 전 사령관은 국회 봉쇄 상황과 체포조 운용, 명단 확인 및 구금 계획 등을 설명했다고 홍장원 전 1차장은 회고했다.
한편, 홍장원 전 1차장은 조태용 전 국정원장이 국정원 폐쇄회로(CC, Closed-Circuit) 텔레비전(TV)과 자신의 증언 내용이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앞서 홍장원 전 1차장은 국정원 청사 내부에서 여인형 전 사령관에게 체포 명단을 전달받았다고 증언했으나, CCTV 화면상에는 그가 해당 시간에 청사 앞 공터를 지나고 있어 신빙성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홍장원 전 1차장은 "국정원 CCTV에는 GPS(위성항법장치, Global Positioning System)가 연동되어 있어 정확하다고 했지만, 국정원에 CCTV를 납품한 업체에 확인해보니 약간의 시차가 있다고 했다"며 "CCTV 공개가 상당히 편집된 상태에서 편파적으로 공개된 게 아닌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오는 20일 홍장원 전 1차장을 한 차례 더 불러 윤석열 전 대통령 측의 반대신문을 진행하기로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앞서 증인으로 출석한 박태주 방첩사 정보보호단장(대령)에게 12·3 비상계엄 당시 방첩사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 출동 지시가 계엄법에 따른 정당한 것이라는 취지로 질문하기도 했다.
박태주 단장이 민간기관에 군이 출동하는 것은 위법한 지시라고 생각했다고 밝히자, 윤석열 전 대통령은 "선거관리 업무가 행정 업무이고, 계엄법에 따르면 행정·사무 업무를 계엄 당국이 지휘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검토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법정 들어서는 윤석열 전 대통령.사진=연합뉴스
또한 "북한에 라자루스나 김수키 등 해킹 조직이 많이 있는데, 이런 조직이 행정안전부나 사법 기관에 침투하는 것을 언론에서 보지 않았느냐"며 "계엄이 선포되어 방첩사의 사이버 담당자들이 선관위에 가라고 하면 그런 것과 연관이 있겠구나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느냐"고 재차 추궁했다.
재판부는 이날 재판 기일을 추가로 지정한 뒤 내년 1월 초 내란 재판의 변론을 종결하겠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재판부는 "내년 1월 12일까지 기일을 정하고 재판을 종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며 "우선 1월 14일, 15일도 예비 기일로 지정하고 구체적 심리 계획은 재판부에서 협의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