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내 반도체 산업은 '케이(K)-메모리'의 세계적인 위상을 재확인하는 한 해였다. 지난 한 해 실적 부진을 겪었던 삼성전자는 하반기 들어 확연한 회복세를 보였다.
특히 고대역폭메모리(HBM, High Bandwidth Memory)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분기마다 시장 예상치를 뛰어넘는 역대 최고 실적을 달성했다.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 인프라 구축 경쟁과 더불어 반도체 공급망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격변 속에서, 한국의 대체 불가능한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이 글로벌 기술 패권의 구도를 다시 정립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내년부터 본격적인 메모리 슈퍼사이클(Super Cycle)이 시작될 것으로 기대되며,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 양사의 합산 영업이익이 200조 원을 넘어설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도 제기되는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동안 대외 환경의 불확실성 속에서 난항을 겪었으나, 하반기 반전을 일궈냈다.
1분기와 2분기에는 미국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과 지속되는 미중 갈등으로 인해 사업 불확실성이 커졌다.
특히 삼성전자 디바이스 솔루션(DS, Device Solution) 부문은 큰 온도차를 경험했다.
연초 시장에서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이 약 1년 만에 영업 적자로 전환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메모리 반도체 사업 부진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사업의 조 단위 적자가 겹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1분기, 삼성전자 디바이스 솔루션(DS) 부문은 1조1천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선방했다. 이는 중국 정부의 이구환신(以舊換新) 정책과 미국의 관세 부과를 우려한 중국 업체들의 선구매(Pull-in) 수요 덕분에 시장 전망치를 상회하는 실적을 달성한 결과이다.
2분기에는 선구매에 따른 일시적 수요 증가 효과가 소멸하면서 영업이익이 4천억 원으로 급락, 2023년 4분기의 영업 적자 2조2천억 원 이후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다.
미국발(發) 관세 리스크와 미중 갈등은 반복적으로 발생하며 하반기 실적에도 지속적인 불확실성을 안겼다.
실제로 트럼프는 반도체 품목에 대한 별도 관세 부과를 예고하여 업계에 긴장감을 높인 바 있다.
엔비디아와 삼성전자의 포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8월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윌라드 호텔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리셉션에 참석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포옹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분위기는 지난 7월과 8월을 기점으로 급변했다.
고성능 에이치비엠(HBM) 등 특수 메모리 생산에 제조사들의 생산능력(CAPA)이 집중되면서 범용 디램(DRAM)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범용 디램(DRAM) 매출 비중이 높은 삼성전자는 이러한 시장 변화의 수혜를 크게 입었다.
에이치비엠(HBM) 사업에서도 회복 신호가 나타났다.
삼성전자는 3분기 들어 다수의 고객사에 에이치비엠(HBM) 공급을 확대하며 경쟁력을 되찾는 데 주력했다.
이는 엔비디아의 경쟁사인 에이엠디(AMD, Advanced Micro Devices)와 주문형 반도체(ASIC, Application-Specific Integrated Circuit) 업체인 브로드컴(Broadcom) 등으로 공급망을 다변화한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수조 원대 영업 적자를 기록하던 파운드리 사업에서도 긍정적인 변화가 감지됐다.
성숙 공정 수주 확대로 가동률 회복세가 시작되었으며, 테슬라(Tesla)와 애플(Apple) 등 글로벌 대형 정보기술(IT) 기업들과의 계약 체결 소식이 잇따랐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테슬라와 165억 달러(약 한화 23조 원) 규모의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했으며, 8월에는 애플에 차세대 이미지센서를 공급하기로 발표했다.
시스템 엘에스아이(System LSI)사업부 역시 자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Application Processor)인 엑시노스를 갤럭시Z플립7(Galaxy Z Flip7)에 탑재하며 부활을 알렸다.
차세대 엑시노스 2600은 내년에 출시될 갤럭시S26(Galaxy S26) 시리즈에 탑재될 예정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3분기 매출 33조1천억 원, 영업이익 7조 원을 달성했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에 잠시 내주었던 메모리 1위의 자리를 되찾았고, 디램(DRAM) 시장에서도 경쟁사와의 격차를 크게 줄이며 명예를 회복했다.
삼성-오픈AI, 글로벌 AI 핵심 인프라 구축 협력 체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왼쪽)이 지난 10월1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글로벌 AI 핵심 인프라 구축을 위한 상호 협력 LOI(의향서) 체결식'에서 샘 올트먼 오픈AI 대표와 악수하며 기념 촬영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긍정적인 전망은 샘 올트먼 오픈에이아이(OpenAI, Open Artificial Intelligence) 최고경영자(CEO, Chief Executive Officer)의 방한으로 더욱 강화됐다.
지난 10월 초, 샘 올트먼 오픈에이아이(OpenAI)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을 방문하여 삼성과 에스케이(SK) 그룹과 글로벌 에이아이(AI) 핵심 인프라 구축을 위한 상호 협력 의향서(LOI, Letter of Intent)를 체결했다.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오픈에이아이(OpenAI)가 주도하는 스타게이트(Stargate) 프로젝트에 고성능·저전력 메모리 공급을 담당할 예정이다.
삼성전자의 오랜 숙원이었던 엔비디아(NVIDIA)에 대한 에이치비엠(HBM) 대량 공급도 머지않아 성사될 것으로 관측된다.
10월 말, 젠슨 황 엔비디아(NVIDIA) 최고경영자(CEO)는 한국을 찾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회동하며 깊은 친분을 과시했다.
황 최고경영자(CEO)는 삼성전자가 엔비디아(NVIDIA)의 에이치비엠(HBM) 파트너임을 직접 언급하며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삼성전자는 내년 상반기에 에이치비엠4(HBM4) 양산을 개시할 것으로 전망된다.
증권업계에서는 에이치비엠(HBM) 사업 회복과 범용 메모리 가격 상승, 그리고 시스템 반도체 실적 개선에 힘입어 삼성전자 디바이스 솔루션(DS) 부문이 올해 4분기에 15조 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기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반도체 경쟁이 최고조에 달하고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상황에서도 한국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로 메모리 반도체라는 강력한 축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거대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속에서 메모리라는 카드가 다양한 레버리지(지렛대)로 활용될 수 있었으며, 이는 한국 메모리 산업의 저력을 다시 한번 일깨운 한 해였다고 덧붙였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올해 창립 이래 수많은 역사적인 기록을 세웠다.
특히 33년 만에 삼성전자로부터 디램(DRAM) 시장 1위(1, 2, 3분기)뿐 아니라 전체 메모리 시장 1위(2분기) 자리까지 빼앗았다.
기업 규모를 고려할 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에 비유될 만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미국발 관세 리스크와 대외 불확실성이 심화되던 상반기에도 견조한 실적을 유지했다.
1분기에 7조4천400억 원, 2분기에는 9조2천100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1분기 6조6천900억 원, 2분기 4조6천800억 원)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3분기에는 창립 이래 최초로 영업이익 10조 원을 돌파했으며, 매출 또한 24조4천500억 원으로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했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의 이러한 성과는 에이치비엠(HBM)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한 덕분이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올해 3분기 에이치비엠(HBM) 시장에서 58퍼센트(%)의 높은 점유율을 차지했다고 분석했다.
에이치비엠(HBM)은 범용 메모리와 달리 고객사와 사전에 계약을 체결한 후 생산하는 수주 형태의 제품이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일찍이 올해 에이치비엠(HBM) 물량을 전량 판매 완료하며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마련했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에이치비엠(HBM) 개발 초기 단계부터 엔비디아(NVIDIA)와 긴밀한 파트너십을 유지해왔다.
엔비디아(NVIDIA)의 에이아이(AI) 가속기에 탑재되는 에이치비엠3이(HBM3E)를 사실상 독점 공급했으며, 연내 에이치비엠4(HBM4) 양산을 시작해 내년에는 엔비디아(NVIDIA)에 공급할 계획이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NVIDIA) 외에도 주문형 반도체(ASIC) 업체들로 고객사를 확장하며 시장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구글의 최신 티피유(TPU, Tensor Processing Unit) 7세대(P·코드명 아이언우드)에 에이치비엠3이(HBM3E) 8단을 우선 공급하고 있으며, 다음 세대 티피유(TPU 7e)에 들어가는 에이치비엠3이(HBM3E) 12단 또한 독점 공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4분기에도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할 것으로 전망된다.
연합인포맥스가 최근 1개월 이내 보고서를 발표한 증권사 8곳의 컨센서스(Consensus, 실적 전망치)를 종합한 결과, 에스케이(SK)하이닉스의 4분기 영업이익은 15조6천71억 원으로 예측됐다.
환담 후 취재진 질문 답하는 최태원 회장-젠슨 황 최고경영자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31일 경북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에 참석해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과 만나 환담 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메모리 슈퍼사이클의 도래와 함께 내년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사상 최고 실적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증권업계는 내년 삼성전자의 전체 연간 영업이익이 약 88조5천억 원,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80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외국계 증권사의 컨센서스(Consensus)는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이다.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는 지난달 보고서를 통해 삼성전자의 내년 영업이익을 116조4천480억 원으로 전망했으며, 이 중 디바이스 솔루션(DS) 부문 영업이익은 94조6천25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다.
노무라증권(Nomura Securities)은 에스케이(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이 99조 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이러한 전망을 종합하면, 양사의 연간 영업이익 합계가 200조 원을 넘어설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화두가 그래픽 처리 장치(GPU, Graphics Processing Unit)나 에이아이(AI) 칩에서 메모리 반도체로 이동하는 양상을 보인다며, 내년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본격화되면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케이(K)-메모리'의 영향력이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