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王建, 877~943) 생애에 최대의 패전이 대구 동구 지묘동전투, 즉 공산싸움이다.
왕건으로 인해 대구에 많은 지명이 생겨났다.
견훤(甄萱, 867~936)과 왕건의 최대 격전지는 동화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무태교 근처로 양측에서 쏜 화살이 내를 이루었다고 살내(화살의 내, 전탄: 화살전箭, 내탄灘)라는 지명이 생기고 후퇴하다가 마을을 지나면서 게으른 사람이 없는 마을이라고 무태(없을無, 게으를怠).
다음 동네를 지나가니 글 읽는 소리가 낭낭하여 연경동(硏俓洞), 신숭겸(申嵩謙)이 왕건을 살리기 위해 신숭겸이 왕건의 복장으로 변복하고 왕건은 병졸로 변복, 신숭겸이 이 기묘한 지혜의 꾀를 낸 곳이 지묘동(지혜智, 묘할妙), 신장군이 전사하고 그가 패한 고개 이름이 파군재이고 머물렀던 산이 지묘동 왕산(王山).
달아나며 홀로 앉았다는 그 바위가 봉무동의 독좌암(獨坐岩), 공산싸움으로 어른들은 다 도망가고 아이들만 있다고 불로동(不老洞), 긴장했던 얼굴을 풀었다고 해안(풀解, 얼굴顔), 나무꾼이 왕건에게 주먹밥을 주고 돌아와보니 왕이 가고 없어서 왕을 잃어버렸다고 평광동의 실왕리(失王) 현재는 시량, 시랭이로 발음.
사지(死地)에서 벗어나서 휴~! 하고 안도하니 동구의 안심이고 외롭고 고독한 도망자의 밤길에 반달이 비치니 반야월(半夜月), 목이 말라서 맑은 샘에서 물을 마시니 숙천(淑泉), 그 샘이 지금 숙천초등학교 안에 있다.
좀 더 도망가니 앞에 맑은 물의 냇가가 있어서 청천(맑을淸, 내川)에서 목욕제계하고 또 비슬산(앞산)으로 도망하며 몸을 은닉하여 숨은 절이 은적사(숨을隱, 발자취跡), 좀 더 가서 마음 편하게 머문 절이 안일사(安逸寺), 가다가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거처한 굴이 왕굴(王窟), 더 멀리 달아나서 비로소 휴식다운 휴식을 취했다는 임휴사(臨休寺).
지난 5월12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시민들이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의 유세를 지켜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도주 경로와 대구 민심의 의미
도주 경로를 요약하면 금호강 무태교 남단의 살내-전탄(화살의 내)-산격동-무태-연경-파군재(지묘동)-봉무동(독좌암)-불로동-해안-평광동 시량-안심-반야월-숙천-청천-은적사-안일사-왕굴-임휴사-김천 황악산 직지사에서 능여선사에게 비법을 배워 개경으로 돌아가서 인고의 나날로 재정비하여 왕건은 고려(高麗)를 개국하고 태조(太祖)에 등극했다.
“대구에서 승자인 후백제 견훤의 고사는 없고 패자인 왕건의 전설만 가득한 것은 승자라도 합당한 정권을 창출 못하면 대구 민심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대구는 예부터 의리 있는 보수의 도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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