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선주(한글이름 슬비) 학생 학교 친구들이 빠른 쾌유를 기원하는 응원 메세지를 많이 보냈다. 그 중 일부이다. 故 이선주(한글이름 슬비) 학생은 경북외국어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사진=더프리덤타임지)
22/08/01
슬비 친구들이 밤낮없이 슬비에게 보내주는 카톡, 문자, 블로그, 인스타 글들을 보면 참 많은 위로가 된다.
내가 이렇게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는 이유는 슬비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일일이 근황을 공유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다수의 많은 어른은 슬비를 떠나보낸 슬픔을 잊고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그분들 또한 슬픔과 아픔을 겪었기에 그렇게 말씀들을 하시겠지….
하지만 슬비의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우리 슬비를 잊지 않고 항상 기억하겠다고 말한다. 우리에겐 너무나 큰 힘이 되는 말이다.
슬비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슬비의 친구들은 슬비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3일 내내 자리를 지켜주었고 우리에게 슬비의 학교생활과 교우관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지금도 우리에게 힘내라고 슬비를 영원히 기억하겠노라고 위로를 한다.
나의 아가야 슬비가 커가면서 사회를 향해 우리 곁을 떠나게 될 것을 항상 아쉬워했고 그래서 더 함께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다. 이렇게 한순간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버릴 줄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슬픈 일은 항상 남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우리 슬비가 아픈 곳 없이 잘 자라주는 것을 항상 감사히 생각했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슬비가 쓰러지기 전날 머리가 아프다고 연락이 와 휴가를 쓰고 데려오는 길에 컨디션이 좋아진 슬비는 "집에 갔는데 멀쩡하면 어쩌지?" 하면서 걱정을 했다. 나는 "얌마 괜찮으면 다행이지~덕분에 평일에 이렇게 데이트도 하고 아빠는 너무 좋아~"라고 했다.
이렇듯 항상 좋은 일만 가득하리라 생각했다. 항상 우리 슬비와의 즐거웠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즐겁게 이야기했던 기억들만 생각했다.
지금 우리는 즐거웠던 기억은 머릿속 깊이 숨어버렸고 슬비가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만 떠올리며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회상하며 후회하고 아쉬워한다.
그래서 어른들이 가슴에 묻고 잊으라고 이야기 하나 보다. 슬비 친구들은 슬비와 즐거웠던 기억들만 남아 있기에 슬비를 기억하길 바라는 것이겠지.
이러한 슬픔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우리 슬비와 좋았던 기억들만 추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자식을 먼저 보낸 우리 부부의 숙명이다.
순간순간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병상 위 슬비의 모습에 하루에도 수십 번 가슴이 철렁하고 애간장이 녹아내린다. 이젠 돌이킬 수 없음을 알지만 두 달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빌고 또 빌어본다.
의미 없는 시간들 속에서 의미 없는 생각들과 의미 없는 행동들만 반복하게 되는 것 같다.
슬비가 대학에 가고 졸업해 취업하고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육아는 내가 해주겠다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내 새끼가 아이를 낳으면 얼마나 이쁘겠냐고 내가 다 키워주겠다고 말하며 웃곤 했다.
이제 우리 부부는 남은 여생을 둘이서 살아가야 한다. 남들 자식이 대학 가고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건조하게 살아가야 한다.
인생 참 고달프다.
22/08/02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은 커져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슬픔은 커져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픔도 커져간다.
시간이 지나면 옅어질 줄 알았다.
시간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불쌍한 내새끼...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병상에 누워있던 하루하루가 생생하다. 하마나 나아질까? 하마나 일어날까? 매 순간 기도하고 염원했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 어린 것이 무슨 잘못이 있어 이렇게 허망하게 가야 했는지….
하늘이 원망스럽고
세상이 원망스럽다.
부모인 우리는 이렇게 멀쩡한데 왜 우리 슬비가 아파야 했고 왜 우리 슬비가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너무도 분통이 터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의미를 잃어간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진다. 아무런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우리 슬비가 너무너무 보고 싶다.
22/08/03
8년전...
슬비는 9살이었다.
슬비는 언제나 내 옆에 있었다.
이젠 슬비와 관련된 모든 일이 과거가 되어버렸다. 남은 우리에겐 더 이상 미래는 없다. 우리는 과거와 함께 현재를 살아가야 한다.
미래가 없는 삶에 가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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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비는 뇌전증과 자가면역뇌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백신을 맞은 것 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고 화이자 측에서 발표한 부작용에 자가면역뇌염이 있기에 백신 부작용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슬비의 사례를 공유하기 위해 여기저기 둘러보니 백신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사례가 50만에 육박한다. 인지하지 못하거나 공유되지 않은 사례까지 포함한다면 몇 배는 더 많을 것이다.
보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우리 곁을 떠났기에 우리에겐 슬픔만 남겨주고 떠났다.
문제는 백신 부작용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중 심적 고통 외에도 엄청난 병원비로 인해 생활고를 겪으시는 분들도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슬비가 보름간 투병하는 데 든 비용만 해도 엄청나다. 하루에 백만 원이 넘는 비용이 든다. 몇 개월에서 몇 년씩 투병을 하게 되면 그 비용은 한 가정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비용이다. 희귀병으로 산정 특례를 적용받아도 수개월이면 실손도 한도 초과된다. 입원비는 120~180일 한도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백신을 강요하고 그 후유증과 부작용에는 입을 다문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 유가족과 중증 환자들이 바라는 것은 피해 보상이 아니다. 대부분은 이렇게 심각한 부작용이 있음에도 멈추지 않고 접종을 강요하는 현실을 알리고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이고 책임자의 사과와 현실에서 피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살아갈 희망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 같은 사고에는 관심이 많던 국민 중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삶의 의지가 사라져 적극적으로 나서서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고액의 병원비와 고통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안타까운 분들이 많다는 것을 글로라도 알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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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하다가도 의식 없이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누워있는 슬비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리고 슬비의 식어가는 마지막 모습이 그려질 때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이 몰려와 눈물이 흐른다.
더 이상 우리 슬비를 볼 수 없음을 깨달으면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지금의 시간들이 왜 나에게 일어나야 했는지도 모른 채 참담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조금 전까지 옆에 있었던 것처럼 슬비의 빈자리가 믿어지지 않는다. 집에 오면 항상 나에게 귀 파달라, 약 발라달라, 라면 끓여달라 이것저것 이야기하던 슬비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오늘은 집사람이 마감까지 일을 해야 해서 새벽까지 혼자 있어야 한다. 아마도 슬비 방에 들어가 목놓아 울겠지….
부모로서 우리 슬비에게 너무너무 미안하고 안타까움에 몸서리치는데 아무렇지 않은 듯 세상에 나와 가식적인 웃음을 짓는 것에 너무 죄책감이 든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다.
故 이선주(한글이름 슬비) 학생이 생전에 아빠(본지 이상훈 기자) 생일에 쓴 편지와 카드. (사진=더프리덤타임즈)
22/08/04
전 국민 거의 대부분이 백신을 맞았다.
코로나는 전염병이지만 백신은 질병이 아니다.
개인의 선택이 아닌 백신패스로 인한 강제 접종이었다.
백신 부작용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지금 아무렇지 않다고 아무런 관심을 안 가진다.
그게 본인이거나 본인의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도 수십만의 사람들이 백신 부작용으로 고통받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는 인과성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정부는 도입했고 의료계는 동조 후 떼돈을 벌었으니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나 더 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받아야 인정과 책임, 처벌과 보상이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끝나지 않는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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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친구같이 든든했던 나의 딸 슬비
아빠인 나에게 편지 한 장 손에 전해주며 꼬옥 안아주던 나의 슬비...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편지들이기에 책상 옆 메모판에 항상 붙여놓고 생각날 때마다 읽었었다.
오늘 아침 저 소중한 편지들을 보관하려 정리하다 목 놓아 울었다.
내 삶에 슬비가 없다는 것은
내 삶에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오늘도 의미 없는 시간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나의 글들은 이젠 모두 과거형이다.
내 삶도 언젠가는 과거가 되겠지….
22/08/05
담당 교수의 부재로 거의 한 달이 지난 오늘에서야 진단서를 발급받았다. 이상반응 신고를 부탁했더니 기간이 길어서 검토해보겠다고 대답한다.
전국적으로 슬비와 유사한 사례가 많고 특히 청소년들은 수개월이 지나서 부작용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경과 또한 유사하다고 말했더니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다.
문제는 지금처럼 백신 접종을 4차, 5차 계속 진행하게 되면 이러한 사례는 더욱 많아질 것이다. 최근 미국 등에서 코로나 확진 후 나타나는 증상과 백신 부작용 증상이 유사하다는 사례가 나오고 있고 자가면역성 질환이 증가하고 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많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백신 접종과 코로나 확진을 농담처럼 웃으며 이야기한다. 본인 또한 마찬가지였었다.
정부, 질병관리청 등의 잘못된 판단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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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비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나서는 어떤 의욕도 없었다. 오늘은 슬비 진단서를 받기 위해 대구로 향했다. 가는 내내 착잡한 마음이었다. 슬비가 떠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도록 슬비의 정확한 병명을 진단받지 못했다. 사망진단서에도 '뇌염'으로만 적혀있었다. 질병분류코드를 오늘에서야 받았다.
상세 불명의 뇌전증, 자가면역성 뇌염
투병 내내 듣던 질병명이었지만 공식적으로 '진단'을 받지 못했기에 병원으로 향했다. 지난 투병 기간 내내 우리를 괴롭히던 병명이 그대로 적혀있었다.
나는 슬비가 백신 부작용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담당 교수님께 코로나 백신 이상반응 신고를 부탁드렸다. 예상하고 있던 답변을 들었다.
접종과 발병까지의 기간이 7개월여 되기에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고 하신다. 그래도 인과성이 없다고는 말을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는 걸까?
커뮤니티에서 청소년에게 발생한 백신 부작용 사례에 대해 이야기했다. 청소년에게서 접종 후 수개월이 지나 슬비와 비슷한 사례가 많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경련이나 자가면역쪽이냐고 물어보길래 그렇다고 말했고 그 외 다양한 사례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기 싫으시면 안 해줘도 된다고 했고 어차피 오늘 보건소에 갈 건데 직접 신고하면 된다고 말했다. 다만 병원이 구미, 포항, 대구 세 군데다 보니 서류를 발급받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상반응 신고를 하려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라고 말씀드렸더니 감염쪽 관계자들과 상의 후 결정하겠다고 했다.
두 시간여 지난 후 이상반응 신고되었다고 질병관리청에서 문자가 왔다.
세 군데 병원의 의무기록 사본 약 250여 장과 진단서, 필요서류들을 가지고 보건소에 가서 코로나19 예방접종 피해보상 신청을 했다.
보상금 및 장례 보조비 신청 결과는 중요치 않다. 이상반응 신고와 사망자 피해보상 신청 집계 숫자에 한 명 더하기 위해 신청한 것이다.
7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몇 개월이 걸리든 몇 년이 걸리든 상관이 없으니 접수해달라고 말하고서는 뒤돌아섰다.
억울하게 떠난 슬비를 위해 뭐라도 해야 했기에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접수가 끝나고 나서 차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왜 하필 우리 슬비여야 했는지 너무 화가 났다.
코로나 예방접종이 필요 없는 청소년들까지 희생시켜가며 그들은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외고(기숙사)가 아닌 일반고에 진학시켰으면 접종을 하지 않았을까?
구미에서 바로 서울로 갔었으면 달라졌을까?
지금 와서 후회한들 달라질 게 없지만, 나의 행동 나의 결정 하나하나가 후회되고 되돌리고 싶을 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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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진들을 찾아봤다.
늘 그렇듯 나의 옆에는 항상 슬비가 있었다.
방에서 잘 자다가도 밤이 되면 슬그머니 아빠 옆을 찾아와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자던 슬비였다.
언제나 친구처럼 티격태격하면서도 항상 아빠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던 우리 슬비였다.
중학교에 진학하고서도 큰 사춘기 없이 잘 지나갔고 항상 내 옆을 지켜줬다.
외고에 진학하면서 기숙사 생활로 떨어져 지냈지만 귀가하는 날이면 항상 아빠와 마라탕을 먹으면서 학교생활을 이야기해 줬다.
슬비와 함께하던 모든 순간이 나에겐 너무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이젠 그 시간들이 영원히 멈추어 버렸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슬비가 우리 곁에 없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고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이다.
그저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슬비를 그리워하며 과거를 회상할 뿐 미래의 시간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영원히 과거에 갇혀버렸다.
본지 이상훈 기자는 무남독녀였던 故 이선주(한글이름 슬비) 학생을 한시라도 곁에 두고 싶어 포토북을 만들었다. (사진=더프리덤타임즈)
22/08/06
며칠 전 주문했던 포토북이 도착했다.
왜 진작 만들어주지 못했을까?
무엇이든 후회가 된다.
슬비를 기억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
(다음 편에 계속)